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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왜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당에서 군인으로 성공한 뒤 돌아와 청해진을 세웠다. 신라·당·일본을 잇는 해상 교역을 손에 넣었다.
바그다드 지혜의 집에서 일했다. 알고리즘이 그의 이름에서, 알제브라가 그의 책 제목에서 왔다. 인도 숫자를 정리해 서쪽으로 넘긴 것도 그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828 · 바다를 장악한 신라 사람
당에서 군인으로 성공한 뒤 돌아와 청해진을 세웠다. 신라·당·일본을 잇는 해상 교역을 손에 넣었다.
【그때 그 자리】
9세기 초 동아시아 바다는 주인이 없었다. 당은 안사의 난 이후 지방 통제력을 잃었고, 신라는 왕위 다툼으로 흔들렸으며, 일본은 견당사를 드문드문 보낼 뿐이었다. 국가가 관리하지 못하는 바다에서 해적이 사람을 잡아 팔았다.
신라인이 특히 표적이었다. 당의 산둥과 강소 일대에 신라방과 신라원이 있을 만큼 신라 사람이 많이 나가 살았는데, 그중 상당수가 잡혀 온 노비였다.
【왜 그렇게 됐나】
장보고는 완도 부근의 평민 출신으로 보인다. 성씨도 분명하지 않아 궁복 또는 궁파라고도 기록된다. 골품제 아래 신라에서는 올라갈 길이 없었다.
그는 당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됐다. 외국인이 당의 군직에 오른 것이다. 거기서 신라인이 노비로 팔리는 것을 봤다.
828년 귀국해 흥덕왕에게 청했다. 청해에 진을 두어 해적을 막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왕은 군사 1만을 주었다. 중앙의 군대가 아니라 그가 모은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흘렀나】
완도의 청해진은 해적을 없애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신라와 당과 일본을 잇는 삼각 무역의 중심이 됐다. 도자기와 비단과 차가 오갔다.
당에는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다. 일본 승려 엔닌이 당에 유학하며 이 절에 머물렀고, 귀국할 때 장보고 휘하 사람들의 배를 탔다. 엔닌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그 사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장보고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이 외국 승려의 일기라는 점이 이 인물의 성격을 보여준다.
바다에서 얻은 힘은 곧 정치적 힘이 됐다. 836년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도망쳐 왔다. 장보고가 군사 5천을 내주어 그를 왕으로 만들었다. 신무왕이다.
【그래서】
그 값을 요구했다. 자기 딸을 다음 왕의 왕비로 들이라는 것이었다. 경주 귀족들이 반대했다. 해도인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골품제가 그를 끝까지 밖에 두었다.
846년 조정이 보낸 염장이 거짓 투항한 뒤 그를 죽였다. 851년 청해진이 헐리고 주민이 내륙으로 옮겨졌다.
【남은 것】
동아시아 바다를 30년 가까이 쥔 세력이 국가의 손으로 지워졌다. 이후 이 바다의 주도권은 송의 상인에게 넘어갔다.
장보고는 오래 잊혔다. 삼국사기는 그를 열전에 넣으면서도 반역자로 다뤘다. 다시 주목받은 것은 20세기 후반, 해양 진출과 무역이 국가의 화두가 되면서다. 지금 해군 잠수함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인물 하나에 대한 평가가 그 시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따라 바뀐다는 것을 이만큼 잘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