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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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AD 2025
시대
주요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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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지질시대

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전제군주정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넷으로 나눠 통치했고 콘스탄티누스가 다시 합쳤다. 수도가 동쪽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가고, 박해받던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간다.

한반도

삼국의 각축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전쟁 1건

4세기 로마-사산 전쟁337 – 363
로마 vs 사산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아르메니아를 두고 두 제국이 반복해 부딪쳤다.

니시비스 공방 350아미다 359크테시폰 원정 363

결과율리아누스 황제가 원정 중 전사하면서 로마는 굴욕적 강화로 다섯 속주를 넘겼다. 두 제국의 소모전은 결국 300년 뒤 아랍의 등장에 길을 열어준다.

26년 · 소모전의 시작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2명

율리아누스정치361 · 시계를 되돌리려 한 황제
AD 331 – AD 363

기독교 황실에서 자랐으나 그리스 철학에 빠져 옛 신들로 돌아가려 했다. 2년 만에 페르시아 원정 중 창에 찔려 죽었다.

  • 이교 부흥 시도 — 실패로 끝남
  • 기독교인의 교직을 금함
  • 마지막 말 「갈릴리인이여, 그대가 이겼다」는 후대의 각색
근초고왕정치371 · 백제 13대 왕
? – 375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열었다. 평양성을 쳐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바다 건너 왜와 통했다.

  • 371년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 칠지도를 왜에 보냄
  •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

그 무렵의 사건

372
고구려 불교 수용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웠다.
왕권 강화의 이념이 들어왔다. 백제·신라가 뒤이어 받아들인다.
372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고구려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며 태학을 세워,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인 국가 체제를 갖췄다.
직전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는 위기를 겪은 뒤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372년 중국 전진에서 불교를 들여와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국가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인재를 길렀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 체계인 율령을 반포해 왕권 아래 통치 질서를 확립했다. 이 정비를 바탕으로 다음 대인 광개토대왕·장수왕 때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330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 도시는 1123년을 더 버틴다.
제국의 무게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 도시는 1,123년을 더 버틴다.
325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한 첫 세계 공의회. 예수가 신과 「동일 본질」이라는 신조가 정해졌다.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낮다고 했고 알렉산드리아 주교들은 반대했다. 황제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 300여 명의 주교를 니케아에 모아 결론을 강요했다. 여기서 나온 니케아 신조는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가 외우고, 부활절 날짜도 이때 정해졌다. 종교 문제를 황제가 결정하는 선례가 함께 생겼다.
313
밀라노 칙령
기독교가 공인됐다. 박해받던 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된다.
박해받던 종교가 공인됐고, 80년 뒤 국교가 된다.
410
로마 약탈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800년 만에 로마를 점령해 사흘 동안 약탈했다.
발칸에서 굶주리던 서고트족은 이탈리아로 내려와 세 차례 로마를 포위했고, 8월 24일 밤 살라리아 문이 열렸다. 대규모 학살은 없었지만 「영원한 도시」가 무너졌다는 충격은 제국 전체를 흔들었다. 히에로니무스는 베들레헴에서 「온 세계를 사로잡은 도시가 사로잡혔다」고 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건에 답하려 「신국론」을 썼다.

교역로 4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인도양 계절풍 항로BC 100 – 700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오간 것로마의 금화가 인도로 흘러가고 후추가 로마로 왔다. 로마 원로원이 금 유출을 걱정할 정도였다.
거점미오스호르모스 · 아덴 · 소코트라 · 무지리스

율리아누스

인물 · 361 · 옛 신들을 되돌리려 한 마지막 황제

기독교 황실에서 자랐으나 그리스 철학에 빠져 옛 신들로 돌아가려 했다. 2년 만에 페르시아 원정 중 창에 찔려 죽었다.

【그때 그 자리】 4세기 중엽.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로마는 빠르게 기독교화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조카다. 여섯 살에 사촌 콘스탄티우스 2세가 왕위 경쟁자를 숙청할 때 아버지와 형제 대부분이 죽었다.

그와 이복형만 어려서 살아남았다. 소아시아의 외딴 곳에 갇혀 자랐다.

【왜 그렇게 됐나】 감시 속에서 책을 읽었다.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나 그리스 고전에 빠졌다.

그를 죽이려 한 자들이 기독교인이었고, 그가 읽어 위로를 얻은 것이 플라톤과 호메로스였다.

몰래 옛 신들에게 돌아갔다. 스무 살 무렵의 일로 본다. 20년 가까이 감췄다.

【어떻게 흘렀나】 355년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갈리아 부사령관으로 보냈다. 책만 읽던 사람이라 실패하리라 여긴 인사였다.

그런데 357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알레만니족을 크게 깼다. 병력이 3분의 1이었다.

361년 병사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했고, 내전 직전에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죽었다.

황제가 되자 공개적으로 옛 신들을 선언했다. 신전을 다시 열고 제사를 되살렸다.

박해는 하지 않았다. 대신 교리 다툼으로 추방됐던 주교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 기독교인들끼리 싸우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결정적인 것은 교육령이다. 기독교인이 그리스·로마 고전을 가르치는 것을 금했다. 「호메로스의 신들을 믿지 않으면서 호메로스를 가르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방식을 따라 했다. 이교 사제들에게 도덕적으로 살고 가난한 이를 구제하라고 지시했다.

「저 갈릴래아 사람들이 자기네 가난한 자뿐 아니라 우리 쪽 가난한 자까지 먹이고 있는데, 우리 사람들은 우리 쪽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그래서】 363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크테시폰 앞까지 갔으나 보급이 끊겼다.

퇴각 중 창에 찔려 죽었다. 서른둘이었다. 자기편이 던진 창이라는 설이 있다.

【남은 것】 그가 죽자 모든 것이 되돌아갔다. 30년 뒤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를 금한다.

기독교 쪽에서 「배교자(아포스타타)」라 불렀다. 죽으며 「갈릴래아 사람이여, 그대가 이겼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100년쯤 뒤 기록이다.

그가 한 시도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 다만 그 시도가 남긴 글로, 4세기 로마가 어떻게 바뀌고 있었는지를 반대편에서 읽을 수 있다.

지도에서 보기: 3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근초고왕 에자나 테오도시우스 광개토대왕 아우구스티누스 찬드라굽타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