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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부유하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65년을 다퉜다.
결과화약·상비군·용병이 결합한 근대 전쟁의 실험장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혼란 속에서 쓰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전쟁으로 끝났다.
풀과 벌레를 그렸다. 당시 여성의 그림이 남은 것 자체가 드물다. 아들 이이를 길렀다는 것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오래된 문제다.
예정설과 엄격한 교회 규율. 그의 가르침은 네덜란드·스코틀랜드·뉴잉글랜드로 퍼져 근대 서구의 정신을 만들었다.
폴란드의 성직자이자 천문학자였다. 죽는 해에야 책을 냈다. 지구가 도는 편이 계산이 훨씬 단순하다는 것이 그의 근거였다.
시신을 직접 해부해 갈레노스 이래 1,300년 된 오류를 바로잡았다.
여섯 번 결혼하고 두 왕비를 처형했다. 교황이 이혼을 거부하자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됐다.
카잔과 아스트라한을 정복하고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했다. 동시에 친위 조직을 만들어 귀족을 학살했고, 화가 나 자기 아들을 때려 죽였다.
168명으로 카하마르카에서 황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방 하나 가득한 금을 받은 뒤 죽였다. 쿠스코가 무너지고 리마가 세워졌다.
형과 5년을 싸워 이긴 직후 168명의 에스파냐인에게 사로잡혔다. 몸값으로 방 하나를 금으로, 두 개를 은으로 채웠는데도 죽임을 당했다.
에스파냐·네덜란드·오스트리아·나폴리·신대륙을 한 손에 쥐었다. 루터를 심문했고 프랑스와 오스만과 싸우다 지쳐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베오그라드와 로도스를 취하고 빈을 포위했다. 법전을 정비하고 이스탄불을 건축으로 채워 튀르크인은 그를 카누니(입법자)라 부른다.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피를 함께 받았다.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카불로 밀려났다가 인도로 내려갔다. 회고록을 직접 썼다.
덴마크가 주도하던 칼마르 동맹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며 근대 스웨덴 왕국의 시조가 됐다.
스물다섯에 아즈텍의 마지막 지도자가 되어 80일 포위를 버텼다. 금을 어디 숨겼느냐며 발을 불에 지지는 고문을 받았다. 지금 멕시코에서 저항의 상징이다.
수백 명의 병사와 원주민 동맹, 천연두로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했다. 아즈텍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세워졌다.
이(理)를 중심에 둔 주리론을 세워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틀을 완성했다.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길렀다.
남아메리카 끝의 해협을 찾아 태평양에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에서 전사했으나 남은 배 한 척이 세비야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구 20만의 도시를 다스렸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에스파냐인을 궁에 들였다가 볼모가 됐고 성난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인쇄술을 타고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교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그리스어 신약을 펴냈다. 루터에게 길을 열었지만 분열은 거부했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인물 · 1540 · 이름이 남은 드문 여성
풀과 벌레를 그렸다. 당시 여성의 그림이 남은 것 자체가 드물다. 아들 이이를 길렀다는 것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오래된 문제다.
【그때 그 자리】 1504년 강릉에서 났다. 아들이 없는 집의 둘째 딸이었다.
조선 전기는 아직 아들과 딸이 재산을 고르게 나눠 받았고, 혼인 뒤 남자가 처가에 사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혼인한 뒤에도 오래 친정에 머물며 아이를 낳고 길렀다.
이런 조건이 아니었다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였다면 달랐다.
【왜 그렇게 됐나】 「사임당(師任堂)」은 스스로 지은 호다.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스승 삼는다는 뜻이다. 여성이 스스로 호를 짓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일곱 살에 안견의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렸다고 전한다. 초충도 —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이 특히 알려졌다. 수박과 나비, 가지와 방아깨비, 오이와 개구리.
산수화도 남겼다. 어숙권이 「동양의 안견 다음간다」고 적었다.
【어떻게 흘렀나】 아들 이이가 아홉 번 장원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다. 딸 이매창도 그림을 남겼다.
1551년 마흔여덟에 서울에서 죽었다. 이이가 열여섯이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그의 이름이 크게 알려진 것은 송시열 때문이다. 노론이 이이를 학문의 정통으로 세우면서 그 어머니를 함께 높였다.
그 과정에서 화가가 아니라 「어머니」로 굳어졌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아니라 위인을 길러 낸 사람이 됐다.
【남은 것】 2009년 5만원권에 실렸다. 우리 화폐에 실린 첫 여성이다.
그런데 그때도 논란이 있었다. 현모양처의 상징을 고른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본인의 삶을 보면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스스로 호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으며,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한 기록이 있다. 뒷사람이 씌운 이름과 본인이 산 삶이 다른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