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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왜50년간 유럽을 유린한 마자르 기마군이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했다.
결과오토 1세가 중장기병으로 정면 돌파해 궤멸시켰다. 마자르는 약탈을 멈추고 정착해 헝가리 왕국이 됐고, 오토는 7년 뒤 황제가 된다.
왕건의 아들로, 공신과 호족이 왕을 좌우하던 판을 뒤집었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가 그 도구였다.
마자르의 약탈을 끝내고 황제 대관을 받았다. 주교를 제후로 삼아 세속 귀족을 견제한 방식이 이후 제국의 특징이 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나침반 없이 별과 물결과 새를 읽어 태평양을 건넜다. 마오리 전승에서 아오테아로아를 처음 찾은 이가 쿠페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958 · 호족의 힘을 꺾은 왕
왕건의 아들로, 공신과 호족이 왕을 좌우하던 판을 뒤집었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가 그 도구였다.
【그때 그 자리】
고려는 왕건이 호족과 손잡고 세운 나라였다. 부인이 29명이고 처가가 29개 가문이었다는 것은 곧 왕권이 그 가문들에 나눠져 있었다는 뜻이다.
왕건이 죽자 바로 드러났다. 2대 혜종은 왕규의 위협 속에 재위 2년 만에 죽었고, 3대 정종도 4년 만에 죽었다. 왕이 자기 침소에서 자객을 걱정하는 나라였다.
밖에서는 중국이 5대 10국으로 어지러웠다. 후주가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다.
【왜 그렇게 됐나】
949년 왕이 된 광종은 처음 7년을 조용히 보냈다. 호족을 자극하지 않고 힘을 살폈다.
그리고 순서대로 쳤다.
【어떻게 흘렀나】
956년 노비안검법을 냈다. 후삼국 전쟁 중에 포로가 되거나 빚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해 원래 신분으로 돌려놓는 법이다. 명분은 억울함을 푸는 것이었다. 실제 효과는 호족의 사병과 경제 기반을 줄이는 것이었다. 노비는 곧 호족의 군사였다. 동시에 양인이 늘어 국가에 세금과 군역을 내는 사람이 늘었다. 한 법으로 상대를 줄이고 자기를 늘렸다.
958년 과거제를 시행했다. 후주에서 온 쌍기의 건의를 받았다. 시험으로 관리를 뽑으면 왕이 직접 신하를 고르게 된다. 아버지의 공으로 자리를 잇던 호족 자제 대신, 왕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조정에 들어온다. 중국에서 온 사람을 쓴 것도 국내 세력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960년 관리의 공복을 자·단·비·녹 네 가지 색으로 정했다. 옷 색깔로 위아래가 한눈에 보이게 한 것이다. 서열이 왕을 정점으로 다시 그려졌다.
같은 해부터 숙청이 시작됐다. 왕규의 잔당부터 시작해 개국공신 집안까지 미쳤다.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도 죽었다. 이제현은 뒷날 광종 말년에 옛 신하로 살아남은 자가 마흔에 한둘이었다고 적었다.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광덕과 준풍으로 썼다. 개경을 황도라 불렀다.
【그래서】
975년 죽었다. 26년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왕이 실제로 다스리는 나라였다. 뒤이어 성종이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 유교적 통치 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전에 호족의 힘이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것】
과거제는 이후 936년간 이어져 1894년 갑오개혁까지 갔다. 신분보다 시험을 앞세우는 감각이 이 땅에 깊이 박힌 출발점이 여기다. 지금 한국 사회의 시험에 대한 태도까지 이 계보 안에서 설명되곤 한다.
평가는 갈린다. 왕권을 세워 나라의 틀을 만든 군주인가, 공신을 도륙한 폭군인가.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글에서 광종의 앞 8년은 칭찬하고 뒤는 혹독하게 비판했다. 같은 사람의 같은 목표를, 방법 때문에 둘로 나눠 평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