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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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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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주요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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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지질시대

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서로마의 붕괴

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뒤 서쪽은 게르만 이동을 감당하지 못했다. 황제는 게르만 출신 장군의 허수아비가 됐고 속주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한반도

삼국의 각축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전쟁 1건

광개토대왕의 정복391 – 413
고구려 vs 백제·왜·후연

백제와의 오랜 각축, 그리고 후연·거란과의 국경 다툼이 겹쳤다. 신라가 왜의 침입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 남정의 계기가 됐다.

관미성 392백제 정벌 396신라 구원 400후연 요동 402

결과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중부를 아울렀다.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들어간다.

22년 · 만주와 한강 이북을 아울렀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6명

광개토대왕정치396 · 고구려 19대 왕
374 – 412

열여덟에 즉위해 요동과 만주 동부, 한강 이북을 확보했다. 아버지 왕이 전사한 나라를 물려받아 스무 해 만에 뒤집었다.

  • 396년 백제 58성 700촌 확보
  • 400년 신라를 구원하고 금관가야까지 남하
  • 410년 동부여 복속
  • 광개토왕릉비 1,775자가 남았다
아우구스티누스사상400 · 자기 잘못을 책으로 쓴 사람
AD 354 – AD 430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방탕했던 젊은 시절을 「고백록」에 그대로 적었다 — 서양 최초의 자서전이다.

  • 「고백록」 — 내면을 들여다본 첫 글
  • 「신국론」 — 로마 약탈 이후의 해답
  • 원죄와 은총 — 서방 신학의 뼈대
찬드라굽타 2세정치400 · 굽타의 절정
375 – 415 재위

인도의 고전기라 불리는 시대다. 이때 영이 수학 기호로 쓰이고 십진법이 정리됐다. 칼리다사가 시를 쓰고 나란다에 대학이 섰다.

  • 굽타 전성기
  • 영과 십진법이 자리 잡음
  • 중국 승려 법현이 와서 기록을 남김
테오도시우스정치392 ·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제국을 마지막으로 통일한 황제
347 – 395, 재위 379 – 395

이교 제의를 금지하고 니케아 신조를 강제했다. 죽으며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눴고, 동서 로마는 다시 합쳐지지 않았다.

  • 기독교 국교화(테살로니카 칙령 380)
  • 올림피아 제전 등 이교 제의 금지
  • 사후 동서 로마 영구 분리(395)
알라리크장군410 · 800년 만에 로마를 턴 사람
AD 370 – AD 410

로마군에 복무했던 고트족 지휘관이었다. 약속받은 땅과 봉급을 받지 못하자 로마로 향했다.

  • 로마 약탈 410 — 800년 만의 함락
  • 제국 안에서 자란 뒤 제국을 침
  • 약탈 몇 달 뒤 병사
근초고왕정치371 · 백제 13대 왕
? – 375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열었다. 평양성을 쳐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바다 건너 왜와 통했다.

  • 371년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 칠지도를 왜에 보냄
  •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

그 무렵의 사건

410
로마 약탈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800년 만에 로마를 점령해 사흘 동안 약탈했다.
발칸에서 굶주리던 서고트족은 이탈리아로 내려와 세 차례 로마를 포위했고, 8월 24일 밤 살라리아 문이 열렸다. 대규모 학살은 없었지만 「영원한 도시」가 무너졌다는 충격은 제국 전체를 흔들었다. 히에로니무스는 베들레헴에서 「온 세계를 사로잡은 도시가 사로잡혔다」고 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건에 답하려 「신국론」을 썼다.
372
고구려 불교 수용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웠다.
왕권 강화의 이념이 들어왔다. 백제·신라가 뒤이어 받아들인다.
372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고구려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며 태학을 세워,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인 국가 체제를 갖췄다.
직전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는 위기를 겪은 뒤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372년 중국 전진에서 불교를 들여와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국가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인재를 길렀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 체계인 율령을 반포해 왕권 아래 통치 질서를 확립했다. 이 정비를 바탕으로 다음 대인 광개토대왕·장수왕 때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427
나란다 대학
승려 1만 명이 배우던 곳. 도서관이 몇 달을 탔다.
교사 2천 명과 학생 1만 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티베트·한국·동남아시아에서 유학이 왔다. 신라의 혜초도 인도를 다녀와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1197년 침입으로 불탔고 도서관이 몇 달을 탔다고 전한다.
455
반달족의 로마 약탈
카르타고에서 건너온 반달족이 2주 동안 로마를 털었다. 「반달리즘」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게르만계 반달족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거쳐 429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에 왕국을 세우고 지중해 해적이 됐다. 가이세리크 왕은 황제가 살해된 틈에 함대를 이끌고 테베레강을 올라왔다. 교황 레오 1세가 살인과 방화만은 막았으나 판테온의 청동 지붕과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 황후와 공주들까지 실려 갔다. 534년 벨리사리우스가 왕국을 멸망시켰다.
330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 도시는 1123년을 더 버틴다.
제국의 무게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 도시는 1,123년을 더 버틴다.

교역로 4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인도양 계절풍 항로BC 100 – 700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오간 것로마의 금화가 인도로 흘러가고 후추가 로마로 왔다. 로마 원로원이 금 유출을 걱정할 정도였다.
거점미오스호르모스 · 아덴 · 소코트라 · 무지리스

광개토대왕

인물 · 396 · 스물두 해에 만주를 아우르다

열여덟에 즉위해 요동과 만주 동부, 한강 이북을 확보했다. 아버지 왕이 전사한 나라를 물려받아 스무 해 만에 뒤집었다.

【그때 그 자리】 391년 열여덟에 올랐다. 아버지 고국양왕이 물려준 것은 상처 입은 나라였다.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에게 평양성에서 죽었고, 그 전에는 전연에 수도가 함락되어 왕릉이 파헤쳐지고 어머니가 잡혀갔다.

그 사이에 소수림왕이 있었다. 그는 복수하지 않고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웠다. 광개토대왕이 밖으로 뻗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정비 위에서였다.

【왜 그렇게 됐나】 즉위하자마자 백제를 쳤다. 396년 아리수(한강)를 건너 58성 700촌을 빼앗고 아신왕에게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았다.

398년 숙신을, 410년 동부여를 쳤다. 서쪽으로는 후연을 밀어 요동을 확보했다. 능비에 「빼앗은 성이 64, 촌이 1,400」이라 적혀 있다.

【어떻게 흘렀나】 400년의 남정이 특히 중요하다. 신라가 왜의 침입에 시달리며 도움을 청하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냈다. 왜를 낙동강 하구까지 몰아냈다.

이 원정의 여파가 컸다. 왜와 손잡고 있던 금관가야가 크게 꺾여 가야 연맹의 중심이 내륙 대가야로 옮겨 갔고, 신라는 구원받은 대가로 고구려의 그늘에 들어갔다. 경주 호우총에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나온 것이 그 흔적이다.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를 썼다.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태왕(太王)이라 했다.

【그래서】 412년 서른아홉에 죽었다. 아들 장수왕이 414년 국내성에 능비를 세웠다. 높이 6.4m, 1,775자. 시조 추모왕의 건국부터 왕의 정복과 능을 지키는 규정까지 적었다.

그 비문 가운데 신묘년(391) 기사가 한일 학계의 오랜 쟁점이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신라를 깨뜨려 신민으로 삼았다」로 읽으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고, 주어를 고구려로 보면 정반대가 된다. 일본군이 19세기 말 비면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고쳤다는 주장도 있어 논쟁이 길다.

【남은 것】 스물두 해다. 그 안에 만주와 한반도 중부를 아울렀다. 다만 그가 넓힌 것은 땅이었고, 그 땅을 유지할 제도를 만든 것은 소수림왕과 장수왕이다.

이름 자체가 시호다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 위에 묻힌, 땅을 넓게 열고 나라를 평안케 한 큰 왕」이라는 뜻이다.

지도에서 보기: 3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아우구스티누스 찬드라굽타 2세 테오도시우스 알라리크 근초고왕 장수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