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 왕조

3000
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 왼쪽 · 오른쪽 ▶
지도에 표시
주요 국가
오른쪽 게이지를 끌거나 키보드 ↑↓로 5천 년이 흐릅니다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6억 년 전
AD 2025
시대
주요 공격
주요 공격
국사

지질시대

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봉건 유럽과 십자군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반도

무신정권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100년. 그사이 몽골이 여섯 차례 침입했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했다.

전쟁 1건

무신정권의 성립1170 – 1270
고려 무신 vs 문신

문신이 무신을 천대하는 관행이 쌓였다. 의종의 보현원 행차에서 폭발했다.

보현원의 변 1170김보당의 난 1173삼별초 항쟁 1270

결과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쳐 최씨 정권이 60년을 이었다. 몽골 침입에 강화도로 옮겨 항전했고,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까지 물러나며 끝까지 싸웠다.

100년 · 무인의 시대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6명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정치1180 · 이탈리아와 교황에 맞선 「붉은 수염」 황제
1122 무렵 – 1190, 재위 1155 – 1190

황제권을 세우려 이탈리아 원정을 여섯 번 했고, 십자군 원정 도중 강에서 익사했다. 산속에서 잠자며 독일을 기다린다는 전설이 됐다.

  • 이탈리아 원정 6회, 레냐노 패배(1176)
  • 사자공 하인리히 제압
  • 제3차 십자군 중 살레프강에서 익사
자야바르만 7세정치1181 · 얼굴 216개를 새긴 왕
1122 무렵 – 1218 무렵

참파에 짓밟힌 뒤 나라를 되찾고 불교로 방향을 틀었다. 비문에 병원 102곳과 여관 121곳을 지었다고 적었다.

  • 앙코르 톰과 바이욘
  • 탑마다 새긴 얼굴 216개
  • 병원 102곳
살라흐 앗딘장군1187 · 아이유브 술탄
1137 – 1193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고 하틴에서 십자군을 꺾었다.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
  • 하틴에서 십자군 격파
  • 예루살렘 탈환 1187
주희사상1190 · 성리학을 집대성해 동아시아 700년의 정통을 만든 학자
1130 – 1200

사서에 주석을 달고 이(理)와 기(氣)로 세계를 설명했다. 그의 학문이 조선의 국교가 됐다.

  • 「사서집주」
  • 이기론·격물치지
  • 백록동 서원 재건, 「주자가례」
리처드 1세장군1191 · 살라딘과 겨룬 「사자심왕」
1157 – 1199, 재위 1189 – 1199

재위 10년 중 영국에 머문 것은 반년. 십자군에서 살라딘과 싸우고 돌아오다 붙잡혀 거액의 몸값이 치러졌다.

  • 제3차 십자군, 아르수프 승리(1191)
  • 살라딘과 휴전, 성지 순례 보장
  • 오스트리아에 억류, 몸값 15만 마르크
이븐 루시드사상1150 ·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럽에 돌려준 사람
AD 1126 – AD 1198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주석 —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으로
  • 이성과 신앙은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
  • 말년에 이단으로 몰려 저작이 불태워짐

그 무렵의 사건

1180
베냉 왕국
오늘날 나이지리아 남부에 있던 베냉 왕국은 정교한 청동 조각과 궁정 예술로 이름 높았으나, 1897년 영국의 무력 원정으로 왕궁이 약탈당하고 멸망했다.
12세기 무렵 세워진 이 왕국은 오바(왕)를 중심으로 고도로 조직된 궁정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특히 왕실 조상과 역대 오바를 기리는 정교한 청동·상아 조각('베냉 브론즈')으로 유명했다. 1897년 영국은 무역 분쟁을 구실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왕궁을 불태우고 수천 점의 청동 조각을 약탈해 유럽 박물관으로 실어갔다. 이 유물들은 오늘날까지도 나이지리아 반환 요구와 유럽 박물관들의 소장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
1150
앙코르 문명
저수지와 수로로 백만 명을 먹인 동남아시아 최대의 도시 문명이었다.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스스로를 「전 우주의 지배자」로 선포하며 시작됐다. 거대한 저수지(바라이)와 수로망으로 논에 물을 대 인구를 지탱했다 — 최근 레이더 측량으로 앙코르와트 주변에 근대 이전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가 힌두 사원으로 앙코르와트를 세웠고, 훗날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왜 무너졌는지는 여러 설이 겹친다 — 수리 시설 과부하설, 아유타야와의 거듭된 전쟁설, 상좌부 불교로 옮아가며 신왕 이념이 힘을 잃었다는 설, 나이테 연구로 밝혀진 극단적 가뭄과 폭우의 반복이라는 기후설이 나란히 있다. 1431년 아유타야에 함락된 뒤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지만, 앙코르와트 자체는 승려들이 계속 관리해 완전히 버려진 적은 없다.
1200
라파누이의 석상
섬 하나에 900개를 세우고 나무를 다 썼다.
폴리네시아인이 태평양 한복판의 작은 섬에 닿아 거대한 석상 900개를 세웠다. 옮기는 데 나무가 필요했고, 숲이 사라지자 배를 만들 수 없어 나갈 수도 없게 됐다. 스스로 자원을 다 쓴 사례로 오래 인용됐는데, 쥐와 유럽인이 옮긴 병의 몫이 더 컸다는 반론도 있다.
1206
칭기즈 칸 즉위
흩어진 초원 부족이 하나의 이름 아래 묶였다.
흩어진 초원이 하나가 됐다. 73년에 걸친 정복이 여기서 시작된다.
1135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승려 묘청은 개경의 지덕이 다했다며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이자겸의 난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묘청은 풍수지리를 내세워 개경 대신 서경으로 천도하면 나라가 다시 융성하고 금나라를 정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경의 문벌 귀족들(김부식 등)이 이 주장에 강하게 반대해 천도가 무산되자, 묘청은 서경에서 '대위국'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1135년).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이 1년 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이 사건은 자주적 대외 노선과 사대적 노선,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 사이의 대립을 보여준 사건으로 자주 거론된다.
1215
마그나 카르타
귀족들이 왕에게 법의 제약을 문서로 받아냈다.
왕도 법 아래 있다는 원칙이 문서로 남았다. 입헌주의의 씨앗이 된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파티마 왕조

나라의 멸망 · 1171 · 카이로를 세운 시아파 칼리파국

십자군과 누르 앗 딘 사이에서 흔들리다 시리아에 구원을 청했다. 파견된 살라흐 앗 딘이 재상이 되었고, 마지막 칼리파가 죽자 시아파 왕조를 조용히 끝내고 수니파 아바스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를 올렸다. 200년 시아파 칼리파국이 그렇게 사라졌다.

【그때 그 자리】 909년 북아프리카에서 섰다.

시아파의 한 갈래인 이스마일파다.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라 주장해 그 이름이 붙었다.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카이로를 세웠다.

「알카히라 — 승리의 도시」다.

【왜 그렇게 됐나】 당시 이슬람 세계에 칼리파가 셋 있었다.

바그다드의 아바스,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 그리고 카이로의 파티마다.

파티마는 시아파였다. 나머지는 수니파다.

그런데 이집트 주민 대다수가 수니파와 콥트 기독교인이었다.

강요하지 않았다. 관용으로 다스렸다.

콥트 기독교인을 관리로 썼다. 유대인도 고위직에 올랐다.

재상 야쿱 이븐 킬리스는 유대인 출신 개종자다.

이 관용이 왕조를 유지시켰다는 평가가 있다.

【어떻게 흘렀나】 알아즈하르를 세웠다.

970년에 모스크로 지었고 곧 학교가 됐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학 가운데 가장 오래된 축에 든다.

역설적인 것이 있다. 시아파가 세운 그 학교가 지금 수니파 학문의 중심이다.

「지혜의 집(다르 알히크마)」도 세웠다. 도서관에 장서가 수십만 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홍해 무역을 쥐었다. 인도양에서 오는 향신료가 이집트를 지나 지중해로 갔다.

이탈리아 도시들과 거래했다. 베네치아와 아말피의 상인들이 카이로에 왔다.

「카이로 게니자」라는 문서 더미가 남아 있다. 회당의 창고에 버리지 않고 쌓아 둔 문서 30만 점이다.

상인의 편지, 계약서, 이혼 서류, 아이의 습자까지 있다.

11~13세기 지중해 상업사를 재구성하는 핵심 자료가 됐다.

【그래서】 11세기부터 흔들렸다.

알하킴이라는 칼리파가 기이한 정책을 폈다. 성묘 교회를 파괴했다 — 그것이 십자군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가 실종됐다. 그를 신격화한 무리가 나왔는데 그것이 드루즈파의 시작이다.

1060년대에 대기근이 7년 이어졌다.

나일강 범람이 실패했다.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군대가 인종별로 갈려 서로 싸웠다. 튀르크계·베르베르계·수단계다.

재상이 실권을 쥐고 칼리파는 상징이 됐다.

【남은 것】 1171년 살라흐 앗딘이 끝냈다.

그가 파티마의 재상이었다. 마지막 칼리파가 죽자 아바스 칼리파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를 올리게 했다.

그것으로 왕조가 끝났다. 저항이 거의 없었다.

장서 수십만 권이 흩어졌다. 시아파 서적이 대량으로 없어졌다.

이집트가 수니파로 돌아갔다.

이스마일파는 살아남았다. 지금 니자리 이스마일파의 지도자가 아가 칸이다.

카이로는 남았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톨텍 셀주크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