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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부유하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65년을 다퉜다.
결과화약·상비군·용병이 결합한 근대 전쟁의 실험장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혼란 속에서 쓰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전쟁으로 끝났다.
왜순니파 오스만과 시아파 사파비, 두 이슬람 대제국이 종교적 정통성과 아나톨리아 동부의 패권을 두고 충돌했다.
결과오스만은 대포와 화승총 부대를 앞세워 사파비의 전통적인 기병 중심 군대를 격파했다.
왜금을 찾던 코르테스가 아즈텍에 눌려 있던 부족들을 규합했다. 천연두가 먼저 도시를 무너뜨렸다.
결과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고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본토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인쇄술을 타고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교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그리스어 신약을 펴냈다. 루터에게 길을 열었지만 분열은 거부했다.
인구 20만의 도시를 다스렸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에스파냐인을 궁에 들였다가 볼모가 됐고 성난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남아메리카 끝의 해협을 찾아 태평양에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에서 전사했으나 남은 배 한 척이 세비야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스물다섯에 아즈텍의 마지막 지도자가 되어 80일 포위를 버텼다. 금을 어디 숨겼느냐며 발을 불에 지지는 고문을 받았다. 지금 멕시코에서 저항의 상징이다.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 피렌체 외교관이 실직 후 쓴 얇은 책이 근대 정치학의 출발이 됐다.
수백 명의 병사와 원주민 동맹, 천연두로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했다. 아즈텍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세워졌다.
조각가를 자처했으나 교황의 명으로 4년간 천장에 매달려 「천지창조」를 그렸고, 여든 넘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다.
덴마크가 주도하던 칼마르 동맹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며 근대 스웨덴 왕국의 시조가 됐다.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피를 함께 받았다.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카불로 밀려났다가 인도로 내려갔다. 회고록을 직접 썼다.
베오그라드와 로도스를 취하고 빈을 포위했다. 법전을 정비하고 이스탄불을 건축으로 채워 튀르크인은 그를 카누니(입법자)라 부른다.
에스파냐·네덜란드·오스트리아·나폴리·신대륙을 한 손에 쥐었다. 루터를 심문했고 프랑스와 오스만과 싸우다 지쳐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형과 5년을 싸워 이긴 직후 168명의 에스파냐인에게 사로잡혔다. 몸값으로 방 하나를 금으로, 두 개를 은으로 채웠는데도 죽임을 당했다.
168명으로 카하마르카에서 황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방 하나 가득한 금을 받은 뒤 죽였다. 쿠스코가 무너지고 리마가 세워졌다.
14세에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가 됐다. 12이맘 시아파를 강제해 수니파 이웃들과 갈라선 페르시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나왔다.
여섯 번 결혼하고 두 왕비를 처형했다. 교황이 이혼을 거부하자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됐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신 앞의 평등과 카스트 부정을 설파하며 시크교를 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아홉 명의 구루를 거쳐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로 집대성됐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캘리컷에 도착했다. 향료 무역의 길이 바뀌었고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주인이 됐다.
풀과 벌레를 그렸다. 당시 여성의 그림이 남은 것 자체가 드물다. 아들 이이를 길렀다는 것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오래된 문제다.
장군으로 손니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다. 메카 순례 뒤 팀북투를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키웠다.
예정설과 엄격한 교회 규율. 그의 가르침은 네덜란드·스코틀랜드·뉴잉글랜드로 퍼져 근대 서구의 정신을 만들었다.
인도로 가는 서쪽 길을 찾다 아메리카에 닿았다.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해 두 왕국을 합쳤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그해 콜럼버스에게 배 세 척을 내주었다.
폴란드의 성직자이자 천문학자였다. 죽는 해에야 책을 냈다. 지구가 도는 편이 계산이 훨씬 단순하다는 것이 그의 근거였다.
시신을 직접 해부해 갈레노스 이래 1,300년 된 오류를 바로잡았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나라의 멸망 · 1517 · 기병의 시대가 화승총 앞에서 끝났다
몽골을 막아낸 노예병사 왕조가 250년 뒤 화약에 무너졌다. 마르지 다비크와 리다니야에서 오스만의 포병·소총 부대에 기병 돌격이 통하지 않았다. 셀림 1세는 칼리파 칭호까지 가져가 오스만을 이슬람 세계의 종주로 만들었다.
【그때 그 자리】
맘루크는 노예 군인을 뜻한다. 9세기부터 이슬람 왕조들이 이 제도를 썼다.
방식은 이랬다. 중앙아시아 초원이나 캅카스에서 소년을 사 온다.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군사 훈련을 시켜 정예 기병으로 기른다.
목적이 분명했다. 이들은 현지에 가문도 부족도 없다. 오직 자기를 산 주인에게만 충성한다. 부족 정치에서 자유로운 군대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제도에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군대가 강해지면 그 군대가 권력을 쥔다.
【왜 그렇게 됐나】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가 맘루크를 대량으로 썼다. 살라흐 앗딘이 세운 왕조다.
1250년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7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 맘루크들이 이를 격퇴하고 루이 9세를 사로잡았다.
같은 해 술탄이 죽자 맘루크들이 권력을 잡았다. 노예 군인이 자기를 부리던 왕조를 대신한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1260년이 결정적이었다.
몽골이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아바스 칼리프를 죽인 뒤 이집트로 향했다. 그때까지 몽골을 정면에서 이긴 세력이 없었다.
아인 잘루트에서 맘루크군이 몽골군을 꺾었다. 지금의 이스라엘 북부다.
몽골 주력이 칸의 사망으로 동쪽에 돌아가 있어 병력이 적었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래도 이 승리의 의미는 컸다. 몽골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이 처음 증명됐고, 이집트와 북아프리카가 몽골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바이바르스가 이 전투에서 이름을 얻고 술탄이 됐다. 그는 십자군 국가들을 차례로 쳤고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며 십자군 국가가 완전히 사라진다.
통치 구조가 특이했다. 술탄 자리가 세습되지 않았다. 맘루크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가 올랐다. 아들에게 물려주려 해도 다른 맘루크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실력으로 최고 자리에 오르는 체제였다. 동시에 끊임없는 내분과 암살이 따랐다.
경제는 무역이었다. 인도양에서 오는 향신료가 홍해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가 베네치아로 갔다. 이 중계 이익이 국가 재정의 큰 몫이었다.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됐다. 바그다드가 몽골에 파괴된 뒤 학문의 중심도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래서】
두 가지가 이 나라를 무너뜨렸다.
하나는 1498년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닿은 것이다. 향신료가 홍해를 거치지 않게 되면서 중계 이익이 사라졌다.
다른 하나는 화약이다. 맘루크는 기병 중심의 전통을 고수하고 화기를 천한 것으로 여겼다. 1516년과 1517년 오스만의 화포와 예니체리 앞에 무너졌다.
267년이었다.
【남은 것】
오스만은 이집트를 속주로 삼으면서도 맘루크를 없애지 않았다. 지방 통치에 계속 썼다. 1811년 무함마드 알리가 학살하고서야 사라졌다.
카이로에 맘루크 시대의 건축이 많이 남아 있다. 술탄 하산 모스크가 대표적이다.
노예로 팔려 온 소년들이 세운 나라가 몽골을 막고 십자군을 끝내고 267년을 갔다는 사실이 이 나라의 특이한 대목이다.
지도에서 보기: 15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아즈텍 제국 티무르 제국 잉카 제국 그라나다 토후국 부르고뉴 공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