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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부하 장군들이 제국을 나눠 가졌다. 셀레우코스·프톨레마이오스·안티고노스 왕조가 서로 싸우는 동안 서쪽에서 로마가 올라왔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해당 없음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끌어내려 카르타고 본토를 쳤다. 자마에서 그를 꺾었다.
정장(亭長)이던 사내가 항우를 꺾고 400년 한 제국의 문을 열었다. 「사람을 쓸 줄 알았다」는 것이 스스로 꼽은 승인이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었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사면초가에 갇혔다. 비극적 영웅의 전형이 됐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나라의 멸망 · BC 185 · 다르마로 다스린 뒤에
아소카 사후 50년, 지방 통제가 풀리며 제국은 이미 쪼그라들어 있었다. 총사령관 푸샤미트라가 마지막 황제 브리하드라타를 사열 중에 죽이고 왕조를 열었다. 아소카가 밀던 불교 대신 브라만교가 다시 국가의 축이 됐다.
【그때 그 자리】 BC 322년 무렵 찬드라굽타가 세웠다.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처음으로 하나로 묶었다.
손자 아소카 때 절정이었다.
칼링가 전쟁 뒤 무력 정복을 그만두고 다르마를 폈다.
【왜 그렇게 됐나】 아소카가 죽고 50년 만에 무너졌다.
이유를 두고 오래 논쟁이 있다.
「아소카의 비폭력이 나라를 약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 오래 통용됐다.
군대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대체로 부정된다. 그가 군대를 해산하지 않았고 사형도 폐지하지 않았다.
다른 설명들이 있다.
첫째, 후계가 약했다. 아소카 뒤에 유능한 왕이 나오지 않았고 왕위 다툼이 있었다.
둘째, 제국이 너무 넓었다. 중앙에서 지방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비문에 그 고충이 나온다. 아소카가 지방 관리들에게 「이유 없이 사람을 가두지 말라」고 반복해 지시한다.
지시를 반복한다는 것은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셋째, 재정이다. 대규모 공공사업과 종교 후원이 국고를 소모했다는 견해가 있다.
브라만 계급의 반발도 거론된다. 아소카가 동물 희생 제사를 제한하면서 그들의 기반을 건드렸다.
【어떻게 흘렀나】 BC 185년 마지막 왕 브리하드라타가 살해됐다.
죽인 사람이 자기 군대의 총사령관 푸샤미트라 슝가다.
열병식에서 군대 앞에서 죽였다고 전한다.
슝가 왕조가 섰다.
불교 문헌은 푸샤미트라가 불교를 박해했다고 적었다. 승원을 부수고 승려의 목에 상금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 서술을 두고 논쟁이 있다. 같은 시기 불교 유적이 계속 지어진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산치 대탑이 슝가 시대에 확장됐다.
【그래서】 인도가 다시 갈렸다.
서북에서 그리스계 왕국(인도-그리스)이 들어왔다.
그다음 사카, 파르티아계, 쿠샨이 이어졌다.
인도가 다시 하나로 묶이는 데 500년이 걸린다. 굽타 때다.
그리고 아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그 뒤로도 무굴과 영국령 인도뿐이다.
【남은 것】 아소카의 칙령이 남았다.
바위와 돌기둥에 새겨 제국 곳곳에 세웠다. 지금까지 30곳 넘게 발견됐다.
그런데 오래 읽지 못했다. 브라흐미 문자를 아무도 몰랐다.
1837년 제임스 프린셉이 해독했다.
그때까지 인도에서 아소카는 잊힌 이름이었다. 불교 전승에만 남아 있었다.
지금 인도의 국장이 사르나트의 사자 기둥이다.
국기 한가운데의 바퀴가 아소카의 법륜이다.
2,000년 넘게 잊혔던 왕이 나라의 상징이 됐다.
지도에서 보기: BC 2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마케도니아 왕국 진 카르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