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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새 종교가 100년 만에 이베리아부터 인더스까지를 하나의 정치권으로 묶었다. 사산조는 사라지고 동로마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왜신라가 백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당과 손잡았다. 당은 고구려를 뒤에서 치려는 목적이 있었다.
결과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먼저, 8년 뒤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왜당이 백제와 고구려 땅에 도호부를 두고 신라까지 지배하려 하자, 신라가 약속이 깨졌다고 판단했다.
결과신라가 매소성·기벌포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확보했다.
당으로 가던 길에 해골물을 마시고 돌아섰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이다. 이후 시장과 마을을 돌며 글 모르는 사람에게 불교를 전했다.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군을 이끌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황산벌에서 5천으로 신라 5만을 맞았다. 네 번 이기고 다섯 번째에 무너졌다. 떠나기 전 자기 가족을 죽였다고 전한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약속을 어긴 당을 다시 몰아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묻혔다.
당나라에 유학해 화엄 사상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종을 열었다.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세우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4대 칼리파 알리의 아들. 우마이야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다 카르발라에서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전멸했다.
딸이 죽은 대야성 함락 뒤 고구려와 일본을 거쳐 당으로 갔다. 진골로서 처음 왕이 됐다.
후궁에서 시작해 황후가 되고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됐다. 나라 이름까지 주(周)로 바꿨다.
국법을 어기고 서역으로 나가 17년 만에 경전 657부를 싣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기는 인도 역사의 1급 사료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나라의 멸망 · 668 · 형제가 갈라서서 한쪽이 당에 붙었다
수·당의 대군을 여러 번 막아낸 나라가 정작 안에서 갈라졌다. 연개소문이 죽자 세 아들이 권력을 다퉜고, 맏이 남생이 당에 투항해 길잡이가 됐다. 평양성은 한 달을 버티다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며 함락됐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1세기 압록강 중류의 졸본 일대는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 아니었다. 산이 많고 골이 깊었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주몽 집단이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건국 설화다.
땅이 좁으면 밖에서 얻어야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에 좋은 밭이 없어 힘써 농사지어도 배를 채우지 못하며 성질이 사납고 노략질을 좋아한다고 적었다. 적대적인 기록이지만 조건은 맞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정복으로 먹고사는 구조였다.
【왜 그렇게 됐나】
위치가 운명이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길목이자 중국 세력이 동쪽으로 나오는 통로다. 이 자리에 있는 나라는 계속 싸우거나 사라진다.
고구려는 싸우는 쪽을 택했다. 5부 연맹에서 출발해 왕권을 키웠고, 태조왕 때 옥저를 복속시켰으며, 3세기에는 요동으로 나갔다.
【어떻게 흘렀나】
대가는 컸다. 244년 위의 관구검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옥저까지 달아났다. 342년 전연에 다시 수도가 무너져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가 끌려갔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에게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다. 소수림왕이 불교와 태학과 율령으로 나라를 다시 짰고,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만주와 한강 이북을 확보했다. 5세기 고구려는 동아시아에서 중국 왕조와 대등하게 셈해지는 세력이었다.
6세기 말 중국이 통일되면서 마지막 시험이 왔다. 598년부터 수가 네 번 쳐들어왔다. 612년 우중문의 30만 별동대가 살수에서 거의 전멸했다. 수는 이 전쟁의 부담으로 망했다. 당 태종도 645년 안시성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중국의 두 통일 왕조를 정면에서 막아낸 나라였지만, 668년 안에서 갈라져 무너졌다.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다툰 것이 직접 원인이다.
【남은 것】
고구려의 자취는 지금 세 나라에 흩어져 있다. 지안의 광개토왕릉비와 장군총, 평양의 안학궁, 강서대묘의 사신도가 그것이다. 무덤 벽화 속 씨름하는 사람과 사냥하는 기마인은 문헌이 전하지 않는 생활을 직접 보여준다.
고구려사를 누구의 역사로 볼 것인가는 2002년부터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논쟁이 됐다. 중국은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지방정권으로, 한국은 삼국의 하나로 본다. 고려가 국호로 그 이름을 이었고, 발해가 스스로를 고려라 칭했으며,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계속 그 땅을 우리 것으로 기록했다는 점이 한국 쪽 근거다.
온돌과 된장, 씨름과 활쏘기처럼 지금까지 이어지는 생활 문화가 이 나라에서 확인된다는 점도 함께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