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에데사 백국이 함락되자 베르나르의 설교로 두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결과다마스쿠스 포위 나흘 만에 철수하며 완패했다. 이 실패가 무슬림 세력을 결집시켜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앞당겼다.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나라의 멸망 · 1150 · 전설과 유적 사이
중부 멕시코의 패권 도시 툴라가 버려졌다. 장기 가뭄과 북방 유목 집단의 유입이 겹친 것으로 본다. 아즈텍은 자신들이 톨텍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 정통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자리】 10~12세기 멕시코 중부다.
수도가 툴라(톨란)다.
테오티우아칸이 무너진 뒤의 공백을 채웠다.
【왜 그렇게 됐나】 아스테카가 그들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톨테카」는 나우아틀어로 「장인」 또는 「문명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아스테카 왕가가 톨텍의 후손이라 주장했다.
정통성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기록이 과장됐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았다. 옥을 다루고 깃털을 엮고 글을 썼다. (…) 그들의 옥수수는 사람 키만 했다.」
이런 서술을 사실로 읽을 수 없다.
【어떻게 흘렀나】 케찰코아틀 이야기가 있다.
톨텍의 왕 「세 아카틀 토필친 케찰코아틀」이다.
인신공희를 반대하고 뱀과 나비만 바치게 했다고 전한다.
적대 세력이 술에 취하게 하고 누이와 자게 만들었다.
부끄러워 도시를 떠났다.
동쪽 바다로 가서 뗏목을 타고 사라졌다고 한다. 「언젠가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 이야기가 뒤에 코르테스의 도착과 겹쳐 이야기된다.
다만 「목테수마가 코르테스를 케찰코아틀로 여겼다」는 서술은 정복 이후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가 지금은 유력하다.
【그래서】 유적이 남아 있다.
툴라에 「아틀란테스」라는 석상 넷이 서 있다. 높이 4.6m의 전사상이다.
머리 장식과 나비 모양 가슴판, 창던지개를 들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유카탄의 치첸이트사에 거의 똑같은 양식의 건물과 조각이 있다.
1,000km 떨어진 곳이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가.
오래 「톨텍이 마야를 정복했다」고 설명됐다.
지금은 반대라는 견해, 두 도시가 교역망으로 이어져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견해가 함께 있다.
연대 측정에서 치첸이트사 쪽이 더 이르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남은 것】 툴라가 12세기 중엽 파괴됐다.
불탄 흔적과 부서진 조각이 나온다.
북쪽에서 온 「치치메카」의 침입, 가뭄, 내부 분열이 거론된다.
「톨텍 제국」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는가를 두고도 논쟁이 있다.
툴라의 규모가 테오티우아칸보다 훨씬 작기 때문이다.
아스테카가 그린 톨텍과 발굴로 나온 툴라 사이의 간극이 크다.
이긴 쪽이 자기 조상을 어떻게 그리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