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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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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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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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대항해와 인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한반도

조선 전기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전쟁 2건

장미전쟁1455 – 1487
랭커스터 vs 요크

백년전쟁 패배로 귀족들이 프랑스 영지를 잃고 국내로 돌아왔다. 헨리 6세의 정신 질환이 권력 공백을 만들었다.

타우턴 1461보즈워스 1485

결과보즈워스에서 리처드 3세가 전사하고 튜더 왕조가 열렸다. 대귀족이 서로를 소모시킨 끝에 왕권이 오히려 강해졌다.

32년 · 중세 잉글랜드의 끝
오닌의 난1467 – 1477
호소카와 동군 vs 야마나 서군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 다툼에 유력 가문의 상속 분쟁이 얽혀 교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교토 시가전 개시 1467쇼코쿠지 전투 1467양군 총수 사망 1473서군 해산 1477

결과11년 동안 교토가 불탔고 막부의 권위는 사라졌다. 다이묘들이 각자 영지로 돌아가 서로 싸우는 100년 전국시대가 시작됐다.

11년 · 전국시대의 시작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8명

다빈치과학1490 · 화가이자 기술자
1452 – 1519

노트 속에 미래를 그린 사람

  • 인체 해부도 제작
  • 비행 기계·전차 설계
  • 모나리자·최후의 만찬
콜럼버스정치1492 · 제노바 항해사
1451 – 1506

인도로 가는 서쪽 길을 찾다 아메리카에 닿았다.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었다.

  • 1492년 아메리카에 닿음
  • 네 차례 대서양 항해
  •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음
이사벨 1세정치1492 · 에스파냐를 하나로 묶고 콜럼버스를 후원한 여왕
1451 – 1504, 재위 1474 – 1504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해 두 왕국을 합쳤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그해 콜럼버스에게 배 세 척을 내주었다.

  • 페르난도와 결혼, 에스파냐 통합(1469)
  • 그라나다 정복, 레콩키스타 완성(1492)
  • 콜럼버스 항해 후원, 유대인 추방령
아스키아 무함마드정치1493 · 송가이 제국을 넓힌 왕
1443?년 무렵 – 1538

장군으로 손니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다. 메카 순례 뒤 팀북투를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키웠다.

  • 1493년 쿠데타로 아스키아 왕조를 엶
  • 1497년 메카 순례, 학자와 제도를 데려옴
  • 송가이를 서아프리카 역사상 최대 영토로 확장
바스쿠 다가마탐험1498 ·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닿은 첫 유럽인
1460 무렵 – 1524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캘리컷에 도착했다. 향료 무역의 길이 바뀌었고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주인이 됐다.

  • 인도 항로 개척, 캘리컷 도착(1498)
  • 제2차 항해에서 무력 통상 강요(1502)
  • 인도 부왕으로 코친에서 사망
구루 나낙사상1499 · 시크교를 창시한 구루
1469 – 1539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신 앞의 평등과 카스트 부정을 설파하며 시크교를 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아홉 명의 구루를 거쳐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로 집대성됐다.

  • 카스트 제도와 우상숭배를 비판
  • 공동 식사(랑가르) 전통을 시작해 신분 평등을 실천
  • 펀자브 지역에서 시크교 공동체의 뿌리를 세움
메흐메트 2세장군1453 · 오스만 술탄
1432 – 1481

스물한 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1123년 버틴 성벽이 그의 대포에 뚫렸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
  • 발칸과 아나톨리아 정복
  • 이스탄불 재건
이스마일 1세정치1501 · 시아파를 국교로 삼아 오늘의 이란을 만든 사파비 왕조의 창건자
1487 – 1524, 재위 1501 – 1524

14세에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가 됐다. 12이맘 시아파를 강제해 수니파 이웃들과 갈라선 페르시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나왔다.

  • 타브리즈 점령, 사파비 왕조 창건(1501)
  • 12이맘 시아파 국교화
  • 찰디란에서 오스만에 패배(1514)

그 무렵의 사건

1485
경국대전 반포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 이념과 제도를 총망라한 기본 법전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여러 법령을 정비해왔지만, 통일된 기본 법전이 없어 혼선이 있었다. 세조는 이·호·예·병·형·공의 육전 체제로 국가 운영 전반을 규정하는 법전 편찬을 명했고, 이 작업은 예종을 거쳐 성종 16년(1485)에 「경국대전」으로 완성·반포되었다. 이 법전은 관리 임용과 조세, 군사, 형벌, 토지 제도 등 국가 운영의 근간을 명문화해, 이후 조선왕조 500년 통치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후대에도 새 법령은 이 「경국대전」을 보완하는 「속대전」, 「대전통편」 등의 형태로 추가되었을 뿐, 그 틀 자체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1492
콜럼버스의 항해
아메리카에 닿았다. 두 대륙의 생태와 인구가 되돌릴 수 없이 뒤섞인다.
두 대륙의 작물·가축·질병이 뒤섞였다. 아메리카 인구는 한 세기 만에 급감한다.
1492
레콩키스타 완성
1492년, 스페인 그라나다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 항복하면서 약 780년에 걸친 이베리아반도 재정복(레콩키스타)이 끝났다.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우마이야 왕조 군대가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정복한 이래, 북부에 남은 기독교 왕국들이 서서히 남쪽으로 영토를 되찾아 나갔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으로 두 왕국을 통합한 뒤 그라나다를 함락하며 재정복을 완성했는데, 같은 해 이들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넜다.
1498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며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바닷길을 처음 열었다.
포르투갈은 엔히크 항해왕자 시절부터 반세기 넘게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로를 조금씩 넓혀왔고,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진입로를 확인한 데 이어 다가마가 마침내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이는 지중해와 중동 상인들이 오랫동안 독점해온 향신료 무역로를 유럽이 직접 뚫어낸 사건으로, 이후 포르투갈은 아시아 해상 무역의 강자로 떠올랐다.
1498
사화의 시대
성종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속에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가 잇따라 일어나며 많은 사림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
성종은 지방 중소 지주 출신의 신진 유학자인 사림을 등용해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온 훈구파를 견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두 세력의 갈등이 반복적으로 폭발했다. 1498년 무오사화는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일이 빌미가 되어 사림이 대거 화를 입은 사건이었다. 1504년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 사건을 문제 삼아 훈구·사림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로 숙청한 사건이다. 1519년 기묘사화에서는 급진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 등 신진 사림이 훈구파의 반격으로 몰락했고, 1545년 을사사화는 왕실 외척 간의 권력 다툼에 사림이 다시 휘말려 희생된 사건이다. 이 네 차례의 사화를 거치며 많은 인재가 희생되었지만, 사림 세력은 지방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해 훗날 조선 정치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1453
계유정난
수양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어린 조카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2년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와 황보인 등 원로대신이 국정을 이끌었다. 숙부인 수양대군은 이를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1453년 사병을 동원해 한명회 등과 함께 김종서를 살해하고 정적들을 숙청했다(계유정난). 그는 이 정변으로 병권과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2년 뒤인 1455년 단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아 세조로 즉위했다.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 출신 신하들(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단종 자신도 결국 유배지 영월에서 죽음을 맞았다. 세조는 이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다졌다.

교역로 2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부르고뉴 공국

나라의 멸망 · 1477 · 왕국이 될 뻔한 공국

프랑스와 신성로마 사이에서 왕국이 되려 했던 유럽 최부국. 샤를 돌격공이 낭시 전투에서 스위스 창병에게 패해 전사했고, 며칠 뒤 얼어붙은 시신이 발견됐다. 영지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나눠 가졌고, 그 결혼이 훗날 유럽 전체를 합스부르크의 무대로 만든다.

【그때 그 자리】 14~15세기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있었다.

1363년 프랑스 왕 장 2세가 아들 필리프에게 부르고뉴를 주었다.

그 뒤 네 대에 걸쳐 커졌다.

혼인과 상속과 구매로 플랑드르와 브라반트와 홀란트와 룩셈부르크를 모았다.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그 안에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부유했다.

플랑드르가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모직 산업 지대였다.

브뤼헤가 국제 금융의 중심이었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그곳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궁정이 화려했다.

「황금양모 기사단」을 만들었다. 지금도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에 이어지는 훈장이다.

미술을 후원했다.

얀 반 에이크가 필리프 선량공의 궁정 화가였다.

유화 기법이 이 시기 플랑드르에서 정교해졌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과 「헨트 제단화」가 이 궁정의 후원 아래 나왔다.

음악도 그렇다. 뒤파이와 뱅슈아가 부르고뉴 악파를 이뤘다.

【어떻게 흘렀나】 문제가 있었다.

영토가 이어져 있지 않았다.

남쪽 부르고뉴 본토와 북쪽 저지대 사이에 로렌이 끼어 있었다.

그 사이를 이으면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하나의 왕국이 선다.

마지막 공작 샤를 용담공이 그것을 노렸다.

「중세의 로타링기아를 되살린다」는 구상이었다.

황제에게 왕관을 청했다. 거의 성사될 뻔했는데 마지막에 황제가 밤중에 자리를 떠났다.

【그래서】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막았다.

직접 싸우지 않고 외교로 포위했다. 「보편적 거미」라 불린 사람이다.

스위스 연방을 부추겼다.

샤를이 스위스를 쳤다.

1476년 그랑송과 모라에서 두 번 크게 졌다.

스위스 창병 방진이 부르고뉴 기사를 무너뜨렸다.

모라에서 부르고뉴군 1만이 죽었다.

1477년 낭시에서 세 번째로 졌다.

샤를이 전사했다. 시신이 늑대에게 훼손된 채 며칠 뒤에 발견됐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 상처와 손톱으로 확인했다고 전한다.

【남은 것】 딸 마리가 남았다.

루이 11세가 남부를 가져갔다.

마리가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과 혼인했다.

저지대가 합스부르크의 것이 됐다.

그 손자가 카를 5세다.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과 저지대를 함께 물려받았다.

「전쟁은 남에게 맡기고 그대 오스트리아는 혼인하라」는 말이 이 가문을 두고 나왔다.

그리고 저지대가 합스부르크의 것이 된 것이 100년 뒤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스위스 용병의 명성도 여기서 굳었다. 부르고뉴를 세 번 이긴 뒤 유럽 각국이 그들을 샀다.

지도에서 보기: 14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그라나다 토후국 동로마 제국 티무르 제국 수코타이 왕국 맘루크 술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