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의 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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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세 개의 세계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한반도

남북국시대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전쟁 2건

카롤루스의 색슨 전쟁772 – 804
프랑크 vs 색슨족

라인강 동쪽의 색슨족을 정복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다. 색슨은 30년 넘게 봉기를 반복했다.

이르민술 파괴 772베르덴 학살 782

결과4,500명을 하루에 처형한 베르덴 학살이 저항을 더 키웠다. 결국 정복했고, 이 정복으로 카롤루스는 800년 황제 대관을 받는다.

32년 · 유럽 기독교권의 확장
바이킹 시대793 – 1066
노르드인 vs 유럽 각지

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린디스판 약탈 793파리 포위 885스탬퍼드 브리지 1066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273년 · 유럽 지도를 다시 그렸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카롤루스정치800 · 프랑크 왕
742 – 814

교황에게 황제관을 받았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한다.

  • 프랑크 통일과 색슨 정복
  • 800년 로마에서 황제 대관
  • 카롤링 르네상스
하룬 알라시드정치800 · 「천일야화」의 바그다드를 다스린 칼리파
766 – 809, 재위 786 – 809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 그의 궁정에서 그리스 학문이 아랍어로 옮겨졌고 카롤루스에게 코끼리를 선물로 보냈다.

  • 바그다드 문화 전성기
  • 바르마크 가문 숙청(803)
  • 비잔티움 원정, 카롤루스와 사절 교환
간무 천황정치794 · 수도를 옮긴 천황
737 – 806

나라의 큰 절들이 정치에 개입하자 수도를 헤이안쿄로 옮겼다. 새 도성에는 사찰을 함부로 못 짓게 했다. 이 도시가 이후 1,074년간 수도였다.

  • 794년 헤이안쿄 천도
  • 장안을 본떴으나 성벽은 짓지 않았다
알콰리즈미과학820 · 대수학을 세운 사람
780 무렵 – 850 무렵

바그다드 지혜의 집에서 일했다. 알고리즘이 그의 이름에서, 알제브라가 그의 책 제목에서 왔다. 인도 숫자를 정리해 서쪽으로 넘긴 것도 그다.

  • 대수학 — 방정식을 푸는 법
  • 인도 숫자를 아랍에 소개
  • 그의 이름이 알고리즘이 됐다

그 무렵의 사건

800
카롤루스의 대관
교황이 프랑크 왕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한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교황과 황제의 오랜 다툼도 여기서 싹튼다.
800
절벽 위의 마을
푸에블로 사람들이 벼랑에 집을 지었다.
콜로라도의 절벽 아래 오목한 곳에 돌집을 층층이 올렸다. 사다리를 걷으면 아무도 못 들어온다. 13세기 말 큰 가뭄이 오자 사람들이 모두 떠났고, 후손이 오늘의 호피와 주니다.
818
발해의 전성기(해동성국)
발해는 선왕 때에 이르러 옛 고구려와 부여의 영토 대부분을 아우르는 최대 영역을 이루며 전성기를 맞아, 중국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세운 나라로,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분명히 했다. 9세기 선왕 때에 이르러 만주 대부분과 연해주, 한반도 북부에 걸친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지방 행정 제도를 5경 15부 62주로 정비해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갖췄다. 당시 당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발해의 융성함을 인정해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대등한 이웃 나라로 대우했다.
830
지혜의 집
바그다드의 번역 기관. 그리스·인도·페르시아의 책이 아랍어로 옮겨져 유럽으로 되돌아갔다.
칼리파 알마문은 꿈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았다며 번역을 후원했다고 전한다.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 같은 학자들이 갈레노스·유클리드·프톨레마이오스를 옮겼고, 알콰리즈미는 여기서 대수학과 인도 숫자를 정리했다. 이 책들이 톨레도와 시칠리아에서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지 않았다면 12세기 르네상스도 없었다.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하며 장서는 티그리스에 버려졌다.
850
화약의 발명
9세기 중국 당나라 시기, 불로장생약을 찾던 연금술사들이 우연히 화약을 발명했다. 처음엔 폭죽과 신호탄으로 쓰이다가 점차 무기로 발전했다.
숯·유황·초석(질산칼륨)을 섞어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들려던 도교 연금술사들의 실험 기록에는 오히려 이 혼합물이 불이 붙고 폭발한다는, 당시로선 뜻밖의 위험한 발견이 남아 있다.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화약은 화살에 불을 붙이는 무기, 이어 원시적인 폭탄과 화포로 점차 발전했다.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을 통해, 또는 실크로드 교역로를 통해 이 기술이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까지 전해졌고, 이는 훗날 유럽에서 화약 무기가 중세 기사와 성벽 중심의 전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862
슬라브와 바랑기아
북쪽 사람을 불러다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
루스 원초 연대기는 슬라브 부족들이 서로 싸우다 바다 건너 바랑기아인을 불렀다고 적는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나중에 지배를 정당화하려 쓴 것인지는 아직 논쟁 중이다. 그 길이 뒤에 키예프 루스가 된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카롤루스의 대관

사건 · 800 · 교황이 프랑크 왕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한다.

서유럽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교황과 황제의 오랜 다툼도 여기서 싹튼다.

【그때 그 자리】

476년 서로마가 무너진 뒤 서유럽에 황제가 없었다. 명목상 로마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8세기 말 상황이 바뀌었다.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 대부분을 아울렀다. 카롤루스가 롬바르드와 작센과 바이에른을 정복했다.

교황은 곤란한 처지였다. 롬바르드의 위협을 받았고 비잔티움은 멀었으며 도와줄 힘이 없었다. 그리고 성상 파괴 논쟁으로 동방 교회와 사이가 나빴다.

결정적으로 797년 비잔티움에서 이레네가 아들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서방에서는 여자가 황제 자리에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즉 제위가 비었다는 논리가 가능해졌다.

【왜 그렇게 됐나】

799년 교황 레오 3세가 로마에서 반대파에게 습격당해 눈과 혀를 상하게 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그는 카롤루스에게 도망쳤다.

카롤루스가 로마로 가서 그를 복위시키고 고발 문제를 정리했다.

800년 12월 25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사 중에 교황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로마인의 황제라 선포했다.

전기 작가 아인하르트는 카롤루스가 이를 몰랐고 알았다면 그날 교회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적었다.

이 대목의 진위가 논쟁이다. 몰랐다면 우연이고, 알았다면 각본이다. 다만 그가 불편해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관을 남이 씌워 주는 형식은 그 남이 위에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어떻게 흘렀나】

비잔티움은 격노했다. 로마 황제는 하나뿐이고 그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다는 것이었다. 812년에야 카롤루스를 황제로 인정하되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는 인정하지 않는 선에서 타협했다.

카롤루스는 자기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줄 때 교황을 부르지 않았다. 스스로 관을 씌우게 했다. 앞의 형식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843년 제국이 셋으로 갈렸다. 서프랑크가 프랑스, 동프랑크가 독일, 중프랑크가 이탈리아와 로렌 지역이 됐다.

962년 오토 1세가 다시 황제가 되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이어진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갔다.

【남은 것】

이 대관식이 남긴 문제가 이후 유럽 정치의 축이 됐다.

황제와 교황 가운데 누가 위인가. 교황이 관을 씌웠으니 교황이 위인가, 아니면 황제가 교회를 보호하는 것인가.

이 물음이 서임권 투쟁으로 이어진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에서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눈밭에서 사흘을 기다려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1303년에는 프랑스 왕이 교황을 감금했다.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이 서로를 견제하는 구도가 유럽에서 오래 이어졌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

이 긴장이 유럽에서 국가와 종교의 분리, 그리고 권력의 분립이라는 관념이 자라는 조건이 됐다는 해석이 있다. 중국이나 이슬람권과 다른 길을 간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800년 성탄절 아침의 한 장면이 그 시작이었다.

지도에서 보기: 8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절벽 위의 마을 발해의 전성기(해동성국) 지혜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