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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왜철제 무기와 상비군, 공성탑을 갖춘 최초의 군사국가가 근동을 통째로 삼키려 했다.
결과이집트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하나로 묶었지만, 정복지 주민을 통째로 옮겨 심는 공포 통치가 사방에 적을 만들었다. 결국 바빌로니아·메디아 연합에 지워졌다.
해당 없음
해당 없음
사건 · BC 621 · 피로 쓴 법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 형벌이 지나치게 무거워 「드라콘 같다(draconian)」가 지금도 가혹함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그래도 귀족의 자의적 판결보다는 나았다 — 적어도 적혀 있었으니까.
【그때 그 자리】 BC 621년 아테네다.
귀족들이 재판을 맡았다. 법이 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관습으로 판결했는데, 그 관습을 아는 사람이 귀족뿐이었다.
같은 죄에 다른 판결이 나왔다.
그리고 피의 복수가 있었다. 살인이 나면 가문끼리 갚고 되갚았다.
【왜 그렇게 됐나】 드라콘에게 성문화를 맡겼다.
그가 법을 나무판에 새겨 세웠다. 누구나 볼 수 있게 했다.
이것 자체가 큰 진전이다. 귀족이 자기 마음대로 판결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 내용이 가혹했다.
거의 모든 죄에 사형을 매겼다.
채소를 훔쳐도 사형, 게으름도 사형이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전한다.
「작은 죄도 사형이 마땅하고, 큰 죄에는 그보다 더한 벌이 없기 때문이다.」
뒤의 웅변가 데마데스가 말했다. 「드라콘의 법은 잉크가 아니라 피로 쓰였다.」
지금 영어 「draconian(가혹한)」이 여기서 왔다.
【어떻게 흘렀나】 그런데 한 조항이 남았다.
살인에 관한 법이다.
고의 살인과 고의가 아닌 살인을 나눴다.
고의가 아니면 사형이 아니라 추방으로 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이 용서하면 돌아올 수 있게 했다.
복수를 국가의 재판으로 옮긴 것이다.
가문끼리 갚는 대신 법정이 판단하게 했다.
이 조항만은 뒤에 솔론이 개혁할 때도 남겼다.
BC 409년 아테네가 그 법을 돌에 다시 새겼다. 그 비석 조각이 남아 있다.
【그래서】 30년도 안 돼 문제가 터졌다.
법이 명확해졌으나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일이 계속됐다.
BC 594년 솔론이 개혁에 나선다. 드라콘의 법 대부분을 폐지했다.
【남은 것】 「나쁜 법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논의에서 자주 인용된다.
법이 글로 적히고 공개되는 것 자체가 권력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12표법도, 함무라비 법전도 같은 성격을 갖는다.
드라콘 개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가 극장에서 사람들이 던진 외투와 모자에 덮여 질식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환호의 표시였다는 것인데, 후대의 이야기로 본다.
지도에서 보기: BC 7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동선의 북 에트루리아 문명 솔론의 개혁 탈레스의 일식 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