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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지자 노동력이 귀해지고 농노제가 흔들렸다. 몽골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오스만과 명이 들어섰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잉글랜드 왕과, 대륙에 남은 잉글랜드 영지를 거두려는 프랑스 왕이 부딪혔다. 플랑드르의 모직 이권도 걸려 있었다.
결과116년 만에 프랑스가 대륙에서 잉글랜드를 몰아냈다. 양국 모두 국민 의식이 생겨났다.
백성이 쓸 문자를 만들었다. 측우기와 자격루, 농사직설도 이 시대다.
찬카족이 쳐들어왔을 때 아버지와 형은 달아났고 그는 남아 막았다. 그 뒤 90년 만에 에콰도르에서 칠레까지 4천 킬로미터를 아우르는 나라를 만들었다.
티무르의 손자인데 별을 봤다. 반지름 40미터 육분의로 항성 1,018개의 자리를 재고 1년의 길이를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계산했다. 오차가 1분 이내다.
서로 죽이던 다섯 부족을 하나의 연맹으로 묶었다. 만장일치로 정하고 전쟁은 함께 결정한다는 규칙을 조개구슬 띠에 새겨 전했다. 글자 없이 헌법을 남긴 것이다.
어머니가 관기였다. 세종이 신분을 넘어 썼다. 스스로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와 비의 양을 재는 그릇을 만들었다.
스물한 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1123년 버틴 성벽이 그의 대포에 뚫렸다.
18년을 영의정으로 있었다.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해 유배됐다가 세종이 다시 불렀다. 반대했던 사람을 쓴 것이다.
열일곱에 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다. 2년 뒤 화형당했다.
조카의 제위를 빼앗고 자금성을 지었다. 정화의 대함대를 인도양으로 보내고 몽골 원정에 다섯 번 나섰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사건 · 1443 · 세종은 최윤덕과 김종서를 보내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의 국경으로 확정했다.
당시 압록강·두만강 유역은 여진족이 자주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는 불안정한 접경지였다. 세종은 최윤덕에게 압록강 방면을, 김종서에게 두만강 방면을 맡겨 여진족을 토벌하고 각각 4개의 군(4군)과 6개의 진(6진)을 설치하게 했다. 이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선이 조선의 국경으로 확정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한반도 국경선의 원형이 되었다. 세종은 이와 함께 삼남 지방의 백성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펴 새 영토를 안정적으로 지키게 했다.
세종은 최윤덕과 김종서를 북방으로 보내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선을 조선의 국경으로 확정지었다.
고려 말부터 압록강·두만강 유역은 여진족이 자주 넘나들며 노략질을 벌이는 불안정한 접경지였다. 세종은 이 지역을 안정시키고 영토를 확정하기 위해 대대적인 북방 개척에 나섰다.
압록강 방면은 최윤덕에게 맡겨 여연·자성·무창·우예 4개 군을 설치했고, 두만강 방면은 김종서에게 맡겨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 6개 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국경선이 처음으로 확정되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북쪽 경계의 원형이 되었다.
세종은 새로 확보한 땅을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삼남(충청·전라·경상) 지방의 백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함께 시행했다. 척박하고 위험한 변경으로의 이주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지만, 이 정책 덕분에 새 영토는 실질적인 조선의 땅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지도에서 보기: 14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훈민정음 피렌체 르네상스 구텐베르크 인쇄술 팀북투의 책 이로쿼이 연맹 마추픽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