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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왜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오라 명했다. 무장을 풀면 기소당할 것이 분명해 그는 루비콘을 건넜다.
결과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를 꺾었다. 공화정이 사실상 끝났다.
갈리아를 정복한 군대로 로마를 차지했다. 공화정을 끝냈고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0년의 마지막 통치자. 로마의 힘을 빌려 왕국을 지키려 했으나 악티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중해 해적을 석 달 만에 소탕하고 동방을 정복했으나, 삼두정치가 깨진 뒤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에게 졌다.
공화정의 외피를 남긴 채 1인 지배를 세웠다. 200년의 로마 평화가 여기서 시작된다.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안토니우스를 탄핵했다. 그의 라틴어 문장은 유럽 산문의 교과서가 됐다.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로 아우구스투스의 새 질서에 신화를 입혔다. 단테는 그를 저승길 안내자로 삼았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사건 · BC 44 · 원로원에서 살해됐다. 공화정 회복 대신 제국이 왔다.
공화정 회복을 노린 암살이 오히려 제정을 앞당겼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44년 초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이겨 사실상 유일한 권력자였다.
그해 2월 종신 독재관이 됐다. 임기가 정해진 비상직이던 독재관을 평생 자리로 만든 것이다.
그는 개혁을 서둘렀다. 퇴역병에게 땅을 주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넓히고, 원로원 정원을 900명으로 늘려 속주 출신을 넣었다. 달력을 태양력으로 고쳤다.
동시에 왕처럼 보이는 일이 쌓였다. 자기 얼굴을 새긴 화폐를 찍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로마 화폐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다. 원로원 의원들이 인사하러 왔을 때 일어서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2월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내밀었다. 그는 두 번 거절했다. 군중이 환호했다. 이 장면을 두고 민심을 떠본 것이라는 해석이 오래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로마인에게 왕은 특별한 금기였다. 기원전 509년 마지막 왕을 쫓아낸 뒤 500년 가까이 왕이라는 말 자체가 위험했다.
공화정의 핵심은 권력을 나누고 임기를 짧게 하는 것이었다. 종신 독재관은 그 원칙의 정반대다.
암살자는 60명이 넘었다. 대부분 원로원 의원이고, 상당수가 카이사르에게 사면받거나 관직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브루투스가 그렇다. 그의 어머니는 카이사르의 오랜 연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500년 전 마지막 왕을 쫓아낸 브루투스의 후손이라 여겨졌다. 그 이름이 부담이자 명분이 됐다.
카시우스가 주도했다.
【어떻게 흘렀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었다.
점술가가 3월 15일을 조심하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내 칼푸르니아가 꿈이 불길하다며 말렸다. 그는 나갔다.
폼페이우스 극장에 딸린 회의장이었다. 원로원이 그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청원하는 척 다가가 옷을 잡아당겼다. 신호였다. 스물세 군데를 찔렸다.
셰익스피어가 쓴 브루투스여 너마저라는 말은 수에토니우스가 전한 그리스어 문장을 각색한 것이다. 수에토니우스 자신도 그런 말을 했다는 사람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죽었다는 사람도 있다고 적었다.
【그래서】
암살자들은 공화정이 저절로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지 않았다.
장례식에서 안토니우스가 연설하고 유언장을 공개했다. 카이사르가 시민 각자에게 돈을 남기고 정원을 공공에 개방하라 했다는 내용이었다. 군중이 분노했다. 암살자들이 로마를 떠나야 했다.
유언장에 후계자로 열여덟 살 종손 옥타비아누스가 지목돼 있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패해 자살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꺾었다. 기원전 27년 그가 아우구스투스가 되며 제정이 시작됐다.
【남은 것】
공화정을 지키려 든 칼이 공화정을 끝냈다.
암살로 무엇을 막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이 사건에서 자주 나온다. 그들은 사람을 없앴지만 그 사람을 만든 조건은 그대로였다. 군대가 국가가 아니라 지휘관에게 충성하는 구조, 자영농의 몰락, 내전으로 지친 여론이 남아 있었다.
3월 15일을 뜻하는 이데스 오브 마치가 지금도 배신과 파국의 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인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아우구스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