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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에데사 백국이 함락되자 베르나르의 설교로 두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결과다마스쿠스 포위 나흘 만에 철수하며 완패했다. 이 실패가 무슬림 세력을 결집시켜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앞당겼다.
코르도바의 법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 그의 주석 덕에 유럽이 잊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읽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사건 · 1150 · 저수지 하나로 백만 명을 먹이다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스스로를 「전 우주의 지배자」로 선포하며 시작됐다. 거대한 저수지(바라이)와 수로망으로 논에 물을 대 인구를 지탱했다 — 최근 레이더 측량으로 앙코르와트 주변에 근대 이전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가 힌두 사원으로 앙코르와트를 세웠고, 훗날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왜 무너졌는지는 여러 설이 겹친다 — 수리 시설 과부하설, 아유타야와의 거듭된 전쟁설, 상좌부 불교로 옮아가며 신왕 이념이 힘을 잃었다는 설, 나이테 연구로 밝혀진 극단적 가뭄과 폭우의 반복이라는 기후설이 나란히 있다. 1431년 아유타야에 함락된 뒤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지만, 앙코르와트 자체는 승려들이 계속 관리해 완전히 버려진 적은 없다.
【그때 그 자리】 802년, 지금의 캄보디아다. 자야바르만 2세가 산 위에서 스스로를 「전 우주를 다스리는 왕」으로 선포했다.
이 「신왕」 사상이 이후 600년 앙코르 왕들의 정통성을 떠받쳤다.
【왜 그렇게 됐나】 계절풍 지역에서 벼농사를 안정시키려면 물 관리가 핵심이었다. 바라이라 부르는 거대한 저수지와 수로망을 곳곳에 팠다.
이 관개망 덕에 한 해 여러 번 벼를 거둘 수 있었고, 인구가 크게 늘었다.
2010년대 레이더(라이다) 측량으로 사원 구역 바깥에 방대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는 게 드러났다 — 근대 이전 세계에서 손꼽히게 큰 도시였을 것으로 본다.
【어떻게 흘렀나】 12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가 힌두 신 비슈누를 모시는 사원으로 앙코르와트를 세웠다. 훗날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13세기 자야바르만 7세 이후 상좌부 불교가 퍼지며, 왕을 신으로 모시던 결속력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는 분석이 있다.
【그래서】 왜 무너졌는지는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관개 시설이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져 무너졌다는 설, 아유타야와의 거듭된 전쟁설, 나이테 연구로 확인된 극심한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닥친 기후 충격설이 나란히 제기된다.
1431년 아유타야에 함락된 뒤 왕도는 남쪽으로 옮겨갔다. 다만 앙코르와트는 승려들이 그 뒤로도 계속 관리해, 완전히 버려진 밀림 속 폐허는 아니었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 베냉 왕국 앙코르의 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