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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해당 없음
물을 다스려 일어선 나라의 절정이었다. 해자 한 변이 1.5킬로미터인 사원을 자기 무덤으로 지었다. 돌 500만 톤을 40킬로미터 밖에서 수로로 실어 왔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이 군중에서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몽계필담을 쓴 박학한 관료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사건 · 1113 · 저수지가 왕국을 먹였다
우기에 넘치고 건기에 마르는 땅을 저수지와 수로로 다스렸다. 1년에 두세 번 벼를 거뒀고 그 잉여가 사원을 지었다. 도시 면적이 1,000제곱킬로미터로 산업화 이전 세계 최대였다는 평가가 있다. 15세기에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오며 그 수로가 무너졌다.
【그때 그 자리】 9~15세기 크메르 제국이다. 지금의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태국과 라오스와 베트남 남부까지 걸쳤다.
문제는 물이었다. 우기에 다섯 달 동안 퍼붓고, 건기 일곱 달은 거의 오지 않는다.
물을 가두는 쪽이 이기는 땅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바라이」라는 거대한 인공 저수지를 팠다.
서(西)바라이가 길이 8km, 폭 2km다. 넓이 16㎢에 물 5,000만 톤이 들어간다.
손으로 팠다. 흙을 쌓아 둑을 만들었고, 그 둑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물을 수로로 논에 보냈다. 벼를 한 해에 두세 번 거뒀다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인구가 늘었다. 앙코르 일대가 최대 75만 명에 이르렀다는 추정이 있다 — 산업화 이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권 가운데 하나다.
【어떻게 흘렀나】 물은 종교이기도 했다.
힌두 우주론에서 세계의 중심에 메루산이 있고 그 둘레를 바다가 감싼다. 사원의 탑이 메루산이고 해자가 그 바다다.
앙코르와트의 해자는 폭이 190m다. 종교적 상징이면서 실제 저수 시설이다.
왕이 물을 다스리는 것이 곧 신의 대리인이라는 증거가 됐다. 「데바라자(신왕)」 관념이다.
자야바르만 7세 때 절정이었다. 도로와 함께 병원 102곳과 여관 121곳을 지었다는 비문이 있다.
【그래서】 15세기에 앙코르가 버려졌다.
오래 아유타야(태국)의 침공 때문으로 설명됐다. 지금은 물 자체가 원인이었다는 연구가 유력하다.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14~15세기에 수십 년짜리 대가뭄이 두 차례 있었고 그 사이에 극단적인 홍수가 끼어 있었다.
가뭄으로 수로에 모래가 쌓이고, 이어진 폭우가 둑을 부쉈다. 수백 년에 걸쳐 확장한 시설이라 한 곳이 무너지면 전체가 어긋났다.
고치기에는 체계가 너무 컸다.
【남은 것】 항공 라이다 조사로 2010년대에 새 사실이 드러났다. 밀림 아래에 격자로 구획된 도시와 수로망이 통째로 묻혀 있었다.
사원만 남고 사람이 살던 곳은 나무로 지어 사라진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뒤에 불교 사원이 됐고 완전히 버려진 적은 없다. 캄보디아 국기에 그 실루엣이 들어 있다 — 국기에 건물이 들어간 몇 안 되는 나라다.
기후 변화가 문명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의 사례로 지금 자주 인용된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카노사의 굴욕 앙코르 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