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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50년 동안 황제가 스무 명 넘게 바뀌었다. 군대가 황제를 세우고 죽였으며 은화의 은 함량이 5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국경이 동시에 뚫렸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해당 없음
황건적 진압으로 이름을 얻고 헌제를 옹립해 명분을 쥐었다. 둔전제로 군량을 자급한 것이 다른 군벌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국력이 위의 5분의 1인 촉을 이끌고 다섯 번 북벌했다.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사건 · 212 · 제국의 모든 자유민이 시민이 되다
카라칼라가 속주민 전체에게 시민권을 줬다. 명분은 평등, 실제는 세수 — 시민만 내는 상속세를 걷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로마인」의 뜻이 혈통에서 소속으로 바뀐 사건이다.
【그때 그 자리】 AD 212년이다. 황제 카라칼라가 칙령을 냈다.
제국 안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콘스티투티오 안토니니아나」다. 카라칼라의 공식 이름이 안토니누스였다.
【왜 그렇게 됐나】 그전까지 시민권은 특권이었다.
처음에는 로마시 주민만의 것이었다.
정복하면서 조금씩 넓혔다. 이탈리아 전체로, 그다음 속주의 일부 도시로.
군에서 25년 복무하면 주었다. 관직에 오르면 주었다.
시민에게는 권리가 있었다.
채찍질을 당하지 않는다.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다. 십자가형을 받지 않는다.
사도행전에 바울이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고 말해 처형 방식이 달라지는 대목이 있다.
그것을 한꺼번에 모두에게 준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동기를 두고 논쟁이 있다.
카시우스 디오는 세금 때문이라 적었다.
상속세와 노예 해방세는 시민만 냈다. 시민을 늘리면 세수가 는다.
카라칼라가 군인의 봉급을 크게 올려 재정이 급했다.
다른 설명도 있다.
형을 죽이고 즉위해 정통성이 약했다. 인기를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에 제국 전체를 참여시키려 했다는 종교적 해석이 있다.
이집트에서 나온 파피루스에 칙령의 일부가 남아 있다. 신들에 대한 감사를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래서】 효과가 복잡했다.
형식상 모두가 평등해졌다.
그런데 실질적인 구분이 다른 방식으로 생겼다.
「호네스티오레스(더 나은 자)」와 「후밀리오레스(더 낮은 자)」다.
같은 죄에 다른 벌을 받았다. 고문과 채찍질이 후자에게 적용됐다.
시민권이 보편화되자 그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남은 것】 로마의 특징이 여기 있다.
그리스 폴리스는 시민권을 거의 주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부모가 모두 시민이어야 시민이었다.
로마는 계속 넓혔다. 정복한 사람들을 안으로 들였다.
황제 가운데 에스파냐 출신(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아프리카 출신(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랍 출신(필리푸스)이 나왔다.
카라칼라 자신이 아버지는 북아프리카, 어머니는 시리아 출신이다.
「로마인」이 혈통이 아니라 자격이 된 것 — 그것이 제국을 오래 유지한 조건으로 자주 꼽힌다.
그리고 이 칙령 뒤 「로마인」이라는 말이 지중해 전역의 사람들을 뜻하게 됐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1,000년 뒤까지 스스로를 「로마이오이」라 부른 뿌리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