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50년 동안 황제가 스무 명 넘게 바뀌었다. 군대가 황제를 세우고 죽였으며 은화의 은 함량이 5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국경이 동시에 뚫렸다.
신라·고구려·백제가 차례로 서고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았다. 아직 연맹왕국 단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해당 없음
국력이 위의 5분의 1인 촉을 이끌고 다섯 번 북벌했다.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야마타이국의 여왕으로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친위왜왕 칭호와 거울 100장을 받았다. 나라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규슈설과 기나이설로 갈린다.
황건적 진압으로 이름을 얻고 헌제를 옹립해 명분을 쥐었다. 둔전제로 군량을 자급한 것이 다른 군벌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사건 · 224 · 페르시아가 400년 만에 돌아오다
아르다시르 1세가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아케메네스의 후계를 자처했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로마와 400년을 겨룬다.
【그때 그 자리】 AD 224년이다. 아르다시르 1세가 파르티아의 마지막 왕을 꺾었다.
파르티아는 470년을 이어 온 나라다. 로마와 오래 겨뤘다.
다만 느슨했다. 부족 연합에 가까웠고 왕이 「왕중왕」이라 불렸으나 실권이 제한적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아르다시르가 내건 것이 있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후계다.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의 나라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 사이 550년이 지났다.
가문의 이름 「사산」이 조로아스터교 신전의 사제였던 조상에게서 왔다고 했다.
종교와 왕권을 함께 세웠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전까지 페르시아에서도 국교는 아니었다.
「아베스타」를 정리하고 사제단(모베드)을 조직했다.
불의 신전을 곳곳에 세웠다.
왕이 「아후라 마즈다의 뜻으로 다스린다」고 새겼다.
【어떻게 흘렀나】 파르티아와 달리 중앙집권 국가였다.
관료제를 세우고 세금을 정비했다.
그리고 로마와 400년을 겨룬다.
아들 샤푸르 1세가 260년 에데사에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았다.
로마 황제가 적에게 산 채로 붙잡힌 유일한 사례다.
낙쉐로스탐의 바위에 그 장면이 새겨져 있다. 말 탄 샤푸르 앞에 로마 황제 둘이 있다.
그 바위에 아케메네스 왕들의 무덤이 있다. 일부러 그 아래에 새긴 것이다 — 계승을 주장하는 배치다.
【그래서】 문화가 남았다.
은접시와 직물과 건축이 뛰어났다.
크테시폰의 「타키 키스라」 아치가 남아 있다. 폭 25m로, 콘크리트를 쓰지 않은 벽돌 아치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꼽힌다.
군디샤푸르에 학문의 중심이 섰다. 그리스와 인도의 의학과 철학이 번역됐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그곳으로 피난 왔다.
그 축적이 뒤에 이슬람의 「지혜의 집」으로 이어진다.
체스가 인도에서 이곳을 거쳐 서쪽으로 갔다. 「샤 마트(왕이 죽었다)」가 「체크메이트」가 됐다.
【남은 것】 마니교가 이 시기에 나왔다.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와 불교를 섞은 가르침을 폈다. 한때 왕의 보호를 받았다가 뒤에 처형됐다.
그 종교가 로마와 중앙아시아와 중국까지 퍼졌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젊을 때 9년 빠져 있었다.
사산조는 642년 아랍에게 무너졌다.
이란이 이슬람권이 됐으나 언어를 지켰다. 아랍화되지 않은 것이 이 400년의 축적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