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유라시아 대부분이 한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역참으로 동서가 이어져 사람과 물자와 역병이 함께 흘렀다.
몽골과 강화한 뒤 원의 부마국이 됐다.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조는 이미 기울었다.
왜왕위 계승 분쟁에 에드워드 1세가 중재자로 개입했다가 그대로 속국으로 삼으려 했다.
결과윌리엄 월리스가 처형된 뒤 로버트 브루스가 배넉번에서 대승했다. 아브로스 선언은 「우리는 영광이나 부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적었다.
말리 제국의 왕으로 메카 순례에 수행원 6만과 금 실은 낙타 수백 마리를 데려갔다. 카이로에 금을 너무 많이 뿌려 그 지역 금값이 10년 넘게 회복되지 않았다.
정쟁에 밀려 피렌체에서 추방된 뒤 돌아가지 못했다. 학자만 읽는 라틴어 대신 토스카나 방언으로 써서, 그 말이 이탈리아어가 됐다.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작은 튀르크계 공국을 세워 비잔티움 국경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의 이름을 딴 오스만 왕조는 이후 600년 넘게 이어지며 세 대륙에 걸친 제국으로 성장했다.
메카 순례로 시작해 인도·중국·아프리카까지 돌았다. 마르코 폴로보다 세 배 멀리 갔다.
마자파힛의 재상으로 군도를 통일하기 전에는 향신료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지금 인도네시아가 국가 이념의 뿌리로 그를 든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사건 · 1324 · 말리 제국
황제 만사 무사가 1324년 메카 순례길에 어마어마한 금을 뿌리듯 쓴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개인의 사례로 회자된다. 그가 지나간 카이로 등지에서는 이 대량의 금 유입으로 물가가 한동안 폭등했을 정도였다. 제국의 중심지 팀북투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도 이름을 떨쳐, 서아프리카 곳곳에서 학자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내부 계승 다툼과 외부 세력의 압박으로 15~16세기에 걸쳐 서서히 쇠퇴했다.
14세기, 서아프리카의 말리 제국은 황금과 소금 무역을 장악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말리 제국은 니제르강 유역의 비옥한 농경지와, 사하라를 가로지르는 대상 무역로를 함께 손에 쥔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특히 서아프리카 삼림지대에서 나는 황금과, 사하라 사막의 소금을 맞바꾸는 무역이 제국 재정의 핵심이었다.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 만사 무사는 1324년 독실한 무슬림으로서 메카 성지순례를 떠나며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뿌리듯 썼다. 순례 행렬이 지나간 카이로 등지에서는 갑자기 풀린 대량의 금 때문에 물가가 한동안 크게 치솟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이 일화 덕분에 그는 오늘날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개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제국의 중심 도시 팀북투는 무역 거점을 넘어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도 이름을 떨쳐, 서아프리카 각지에서 학자와 학생들이 모여드는 도서관과 이슬람 대학(마드라사)이 번성했다.
그러나 만사 무사 사후 계승 다툼이 이어지고, 주변 세력(특히 훗날 강성해지는 송가이 제국)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말리 제국은 15~16세기에 걸쳐 서서히 영토와 영향력을 잃어갔다.
지도에서 보기: 13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흑사병 짐바브웨의 번성과 쇠퇴 아유타야 공민왕의 반원 개혁 한자동맹 스위스 연방 성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