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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지자 노동력이 귀해지고 농노제가 흔들렸다. 몽골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오스만과 명이 들어섰다.
몽골과 강화한 뒤 원의 부마국이 됐다.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조는 이미 기울었다.
왜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잉글랜드 왕과, 대륙에 남은 잉글랜드 영지를 거두려는 프랑스 왕이 부딪혔다. 플랑드르의 모직 이권도 걸려 있었다.
결과116년 만에 프랑스가 대륙에서 잉글랜드를 몰아냈다. 양국 모두 국민 의식이 생겨났다.
왜기근과 황하 범람, 그리고 원의 가혹한 부역이 겹쳤다. 백련교 신앙이 봉기를 조직했다.
결과주원장이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을 세웠다.
메카 순례로 시작해 인도·중국·아프리카까지 돌았다. 마르코 폴로보다 세 배 멀리 갔다.
마자파힛의 재상으로 군도를 통일하기 전에는 향신료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지금 인도네시아가 국가 이념의 뿌리로 그를 든다.
홍건적의 난에서 몸을 일으켜 몽골을 북으로 내쫓았다. 재상제를 없애고 공신 수만 명을 숙청해 황제 독재의 틀을 만들었다.
튀니스 출신으로 여러 왕조를 섬기며 관료·재판관으로 일했다. 저서 「무깟디마」(역사서설)에서 왕조의 흥망을 유목민의 결속력(아사비야)과 도시 정착 후의 쇠퇴로 설명해, 근대 사회학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중국이 극비로 지키던 화약 제조법을 원나라 상인에게서 알아내 고려에서 처음으로 화약을 만들었다. 화통도감을 세워 각종 화포를 개발하고, 진포 해전에서 화포로 왜구 선단을 궤멸시켰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사건 · 1356 · 고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이 약해진 틈을 타 친원 세력을 몰아내고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등 자주적인 개혁을 펼쳤다.
그는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원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기철 등 친원 권문세족을 숙청했다. 원이 함경도 일대에 설치했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공격해 100년 만에 그 땅을 되찾았고, 몽골식 풍습(변발·호복)도 금지했다. 신진 사대부를 등용해 권문세족을 견제하려 했으나, 개혁을 뒷받침하던 승려 신돈이 실각하고 공민왕 자신도 시해당하면서 개혁은 완결되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럼에도 그의 개혁은 이후 신진 사대부가 성장해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중요한 발판이 됐다.
원나라의 국력이 기울어가던 14세기 후반, 고려 공민왕은 이 틈을 타 친원 세력을 몰아내고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등 자주적인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는 즉위 후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몽골식 풍습이던 변발과 호복을 금지했다.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던 기철 등 친원 권문세족을 숙청해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다.
군사적으로도 100년 가까이 원나라가 함경도 일대에 설치해뒀던 통치 기구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무력으로 되찾았다. 이는 고려가 원의 간섭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신진 사대부를 등용해 뿌리 깊은 권문세족 세력을 견제하려 했고, 승려 신돈을 등용해 토지·노비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을 추진할 힘이 되어주던 신돈이 정적들의 모함으로 실각하고, 이어 공민왕 자신도 시해당하면서 개혁은 미완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그가 등용한 신진 사대부 세력은 이후 성장을 거듭해, 훗날 이성계와 손잡고 조선을 건국하는 주역이 된다.
지도에서 보기: 13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한자동맹 아유타야 흑사병 직지심체요절 말리 제국의 전성기 위화도 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