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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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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몽골의 세기

유라시아 대부분이 한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역참으로 동서가 이어져 사람과 물자와 역병이 함께 흘렀다.

한반도

원 간섭기

몽골과 강화한 뒤 원의 부마국이 됐다.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조는 이미 기울었다.

전쟁 1건

스코틀랜드 독립전쟁1296 – 1328
스코틀랜드 vs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에 에드워드 1세가 중재자로 개입했다가 그대로 속국으로 삼으려 했다.

스털링 브리지 1297폴커크 1298배넉번 1314

결과윌리엄 월리스가 처형된 뒤 로버트 브루스가 배넉번에서 대승했다. 아브로스 선언은 「우리는 영광이나 부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적었다.

32년 · 자유를 문서로 선언하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5명

만사 무사정치1324 · 금을 뿌리며 순례한 왕
1280 무렵 – 1337 무렵

말리 제국의 왕으로 메카 순례에 수행원 6만과 금 실은 낙타 수백 마리를 데려갔다. 카이로에 금을 너무 많이 뿌려 그 지역 금값이 10년 넘게 회복되지 않았다.

  • 1324년 메카 순례
  • 팀북투에 학자와 건축가를 데려옴
  • 1375년 카탈루냐 지도에 금덩이를 든 모습으로 그려짐
단테예술1320 · 지옥을 라틴어가 아닌 말로 썼다
AD 1265 – AD 1321

정쟁에 밀려 피렌체에서 추방된 뒤 돌아가지 못했다. 학자만 읽는 라틴어 대신 토스카나 방언으로 써서, 그 말이 이탈리아어가 됐다.

  • 「신곡」 — 지옥·연옥·천국 100곡
  • 속어로 쓴 것이 국어를 만듦
  • 죽을 때까지 망명 — 유골은 라벤나에
이븐 바투타탐험1350 · 30년을 걸어 12만 km를 간 사람
AD 1304 – AD 1369

메카 순례로 시작해 인도·중국·아프리카까지 돌았다. 마르코 폴로보다 세 배 멀리 갔다.

  • 아프리카·중동·인도·중국·이베리아를 순회
  • 델리 술탄국의 법관으로 일함
  • 「리흘라」 — 14세기 세계의 목격담
가자 마다정치1350 · 섬들을 하나로 묶겠다 한 재상
? – 1364

마자파힛의 재상으로 군도를 통일하기 전에는 향신료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지금 인도네시아가 국가 이념의 뿌리로 그를 든다.

  • 팔라파 맹세
  • 자바에서 말라카까지
  • 지금 인도네시아 대학과 화폐에 이름이 남았다
오스만 1세정치1299 · 오스만 제국의 이름이 된 초대 군주
1258 – 1326 무렵, 재위 1299 – 1326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작은 튀르크계 공국을 세워 비잔티움 국경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의 이름을 딴 오스만 왕조는 이후 600년 넘게 이어지며 세 대륙에 걸친 제국으로 성장했다.

  • 1299년 독립 공국 선포로 오스만 왕조 시작
  • 비잔티움 변경에서 성전(가지) 전사로 명성을 쌓음
  • 아들 오르한 때 부르사를 수도로 삼음

그 무렵의 사건

1324
말리 제국의 전성기
14세기, 서아프리카의 말리 제국은 황금과 소금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황제 만사 무사가 1324년 메카 순례길에 어마어마한 금을 뿌리듯 쓴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개인의 사례로 회자된다. 그가 지나간 카이로 등지에서는 이 대량의 금 유입으로 물가가 한동안 폭등했을 정도였다. 제국의 중심지 팀북투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도 이름을 떨쳐, 서아프리카 곳곳에서 학자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내부 계승 다툼과 외부 세력의 압박으로 15~16세기에 걸쳐 서서히 쇠퇴했다.
1347
흑사병
3년 만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노동력이 귀해지며 농노제가 흔들린다.
노동력이 귀해져 농노제가 흔들리고 임금이 올랐다. 중세 질서가 여기서 금이 간다.
1300
짐바브웨의 번성과 쇠퇴
모르타르 없이 돌만 쌓아 사하라 이남 최대의 석조 도시를 세웠다.
쇼나족이 세운 도시로, 중국 도자기와 페르시아 유리구슬이 나올 만큼 먼 곳과 교역했다. 20세기 초 백인 식민 당국은 「아프리카인이 이런 걸 지었을 리 없다」며 페니키아인이나 아랍인의 것이라 주장했다 — 1929년 고고학자 캐턴톰프슨의 발굴로 완전한 아프리카 기원임이 확인됐다. 왜 1450년 무렵 버려졌는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 교역로가 해안으로 옮겨갔다는 설, 삼림 파괴와 지력 소진이라는 설, 소빙하기 가뭄이라는 설이 나란히 있다.
1350
아유타야
프랑스 사절이 파리만큼 크다고 적었다.
강 세 줄기가 만나는 섬에 세운 도시로 400년을 갔다. 중국·일본·페르시아·포르투갈 상인이 각자의 구역에 살았다. 1767년 미얀마의 침공으로 불타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방콕을 세운다.
1356
공민왕의 반원 개혁
고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이 약해진 틈을 타 친원 세력을 몰아내고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등 자주적인 개혁을 펼쳤다.
그는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원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기철 등 친원 권문세족을 숙청했다. 원이 함경도 일대에 설치했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공격해 100년 만에 그 땅을 되찾았고, 몽골식 풍습(변발·호복)도 금지했다. 신진 사대부를 등용해 권문세족을 견제하려 했으나, 개혁을 뒷받침하던 승려 신돈이 실각하고 공민왕 자신도 시해당하면서 개혁은 완결되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럼에도 그의 개혁은 이후 신진 사대부가 성장해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중요한 발판이 됐다.
1356
한자동맹
뤼베크를 중심으로 북유럽 상업 도시들이 맺은 동맹. 발트해와 북해 무역을 200년간 지배했다.
청어·모피·밀랍·곡물을 실은 코그선이 노브고로드에서 런던까지 오갔다. 도시들은 공동 창고와 특권을 지켰고 필요하면 함대를 모아 덴마크 왕과 싸워 이겼다. 1356년 뤼베크에서 첫 총회가 열려 동맹이 제도로 자리 잡았다. 영토 국가가 커지고 대서양 무역이 열리면서 쇠퇴했으나, 오늘의 독일 항공사 이름에 그 자취가 남았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테노치티틀란

도시 · 1325 · 75일 포위 끝에 함락되고 헐렸다

【그때 그 자리】

멕시코 중부 고원의 텍스코코 호수다. 해발 2,200미터의 분지에 여러 호수가 이어져 있었다.

메시카 사람들은 북쪽에서 늦게 내려온 집단이었다. 좋은 땅은 이미 다 차 있었다. 다른 도시에 용병으로 고용돼 살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1325년 무렵 호수 가운데 늪지 섬에 자리 잡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땅이었다.

독수리가 뱀을 물고 선인장에 앉은 곳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따랐다고 전한다.

【왜 그렇게 됐나】

늪지라는 조건을 기술로 뒤집었다.

치남파가 핵심이다. 호수 바닥의 진흙을 퍼올려 갈대 틀 위에 쌓아 인공 섬을 만든다. 가장자리에 버드나무를 심어 뿌리로 고정한다.

물이 늘 닿아 있어 비료 없이도 1년에 여러 번 수확했다.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농법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물 문제도 풀었다. 텍스코코 호수는 염분이 있었다. 둑을 쌓아 담수 구역과 분리하고, 차풀테펙에서 수로로 식수를 끌어왔다. 수로가 두 줄이라 하나를 청소하는 동안 다른 하나로 물이 왔다.

둑길 세 개로 육지와 이었다. 둑길 중간에 다리를 놓아 필요하면 걷어낼 수 있게 했다. 방어 장치다.

【어떻게 흘렀나】

16세기 초 인구가 20만 안팎이었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세비야가 5만, 런던이 5만 정도였다.

에스파냐인들이 처음 보고 놀란 기록이 남아 있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는 아마디스 소설에 나오는 마법의 광경 같아 꿈이 아닌지 물었다고 적었다.

거리에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이 1천 명 있었고 공중변소가 있었다. 분뇨는 모아 비료와 염색 재료로 썼다.

틀라텔롤코 시장에 하루 6만 명이 오갔다고 코르테스가 본국에 보고했다. 세비야 시장보다 크고 질서 있다고 적었다.

대신전이 도시 한가운데 있었다. 두 개의 신전을 나란히 올린 이중 구조로, 여러 차례 증축돼 양파처럼 겹쳐 있다.

【그래서】

1519년 코르테스가 500여 명을 이끌고 왔다.

그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셋이다.

첫째, 틀락스칼라를 비롯한 반아즈텍 도시들이 수만 명의 병력으로 합류했다. 실제 전투의 주력은 원주민이었다. 아즈텍의 공물 수취와 인신공희 포로 사냥이 쌓은 원한이 여기서 작동했다.

둘째, 천연두다. 1520년 도시 안에 퍼져 인구가 급감했다. 지도자 쿠이틀라우악도 죽었다.

셋째, 배다. 코르테스는 호수에서 쓸 소형 범선 13척을 만들어 띄웠다. 둑길을 끊는 방어가 무력해졌다.

1521년 8월 80일 포위 끝에 함락됐다. 마지막 지도자 콰우테목이 사로잡혔다.

【남은 것】

에스파냐는 도시를 헐고 그 돌로 그 자리에 멕시코시티를 세웠다. 대신전 자리에 대성당을 지었다.

호수를 메웠다. 그 결과 지금 멕시코시티는 지반이 계속 가라앉는다. 대성당이 기울어 있고 건물마다 높이가 어긋난다. 500년 전 메운 호수 위에 2천만 명이 산다.

1978년 전기 공사 중에 대신전 유적이 발견됐다. 지금 발굴돼 공개돼 있다.

멕시코 국기 한가운데 독수리와 뱀과 선인장이 있다. 이 도시의 건국 설화다. 정복당한 쪽의 이야기가 지금 나라의 표지가 됐다.

지도에서 보기: 13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함피 바르샤바 상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