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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지자 노동력이 귀해지고 농노제가 흔들렸다. 몽골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오스만과 명이 들어섰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잉글랜드 왕과, 대륙에 남은 잉글랜드 영지를 거두려는 프랑스 왕이 부딪혔다. 플랑드르의 모직 이권도 걸려 있었다.
결과116년 만에 프랑스가 대륙에서 잉글랜드를 몰아냈다. 양국 모두 국민 의식이 생겨났다.
왜얀 후스가 화형당하자 보헤미아가 일어섰다. 교황이 다섯 차례 십자군을 보냈다.
결과지슈카가 수레를 둥글게 세워 성벽처럼 쓰고 그 안에서 초기 화기를 쐈다. 농민이 기사단을 깬 것이다. 다섯 차례의 십자군이 모두 실패했다.
조카의 제위를 빼앗고 자금성을 지었다. 정화의 대함대를 인도양으로 보내고 몽골 원정에 다섯 번 나섰다.
프라하에서 면벌부와 교회의 부를 비판했다. 안전을 보장받고 공의회에 갔다가 화형당했다. 그를 따르던 이들이 일어나 15년을 싸웠다.
열일곱에 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다. 2년 뒤 화형당했다.
18년을 영의정으로 있었다.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해 유배됐다가 세종이 다시 불렀다. 반대했던 사람을 쓴 것이다.
콜럼버스보다 90년 앞서 수백 척의 대함대로 동아프리카까지 갔다. 그러나 명은 항해를 멈추고 배를 태웠다.
어머니가 관기였다. 세종이 신분을 넘어 썼다. 스스로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와 비의 양을 재는 그릇을 만들었다.
티무르의 손자인데 별을 봤다. 반지름 40미터 육분의로 항성 1,018개의 자리를 재고 1년의 길이를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계산했다. 오차가 1분 이내다.
찬카족이 쳐들어왔을 때 아버지와 형은 달아났고 그는 남아 막았다. 그 뒤 90년 만에 에콰도르에서 칠레까지 4천 킬로미터를 아우르는 나라를 만들었다.
칭기즈 칸의 혈통이 아니어서 칸을 칭하지 못하고 사위라 했다. 35년을 정복만 했다. 1402년 오스만의 술탄을 사로잡아,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50년을 더 살았다.
백성이 쓸 문자를 만들었다. 측우기와 자격루, 농사직설도 이 시대다.
이성계를 찾아가 새 나라를 함께 그렸다. 한양의 궁궐과 사대문 이름을 유교의 덕목에서 따 지었다. 왕이 아니라 재상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썼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전쟁 · 1419 · 짐마차로 만든 요새
얀 후스가 화형당하자 보헤미아가 일어섰다. 교황이 다섯 차례 십자군을 보냈다. 지슈카가 수레를 둥글게 세워 성벽처럼 쓰고 그 안에서 초기 화기를 쐈다. 농민이 기사단을 깬 것이다. 다섯 차례의 십자군이 모두 실패했다.
【그때 그 자리】 1415년 얀 후스가 콘스탄츠에서 화형됐다.
황제가 준 안전 통행증을 받고 갔는데 갇혔고, 철회를 거부하자 태워졌다.
보헤미아가 들끓었다. 귀족 452명이 항의 서한에 서명했다.
1419년 프라하에서 시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졌다.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이다.
【왜 그렇게 됐나】 요구는 네 가지였다. 「프라하 4개조」다.
설교의 자유, 성찬에서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줄 것, 성직자의 세속 재산 몰수, 중대한 죄를 신분에 관계없이 처벌할 것.
두 번째가 상징이 됐다. 그전까지 잔은 사제만 들었다 —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표시였다.
그래서 후스파의 깃발에 성작(잔)이 그려졌다.
교황과 황제 지기스문트가 십자군을 선포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상대로 한 십자군이다.
【어떻게 흘렀나】 얀 지슈카가 지휘했다.
농민과 장인이 주력이었다. 기사 계급이 거의 없었다.
훈련된 중기병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만들었다.
「보즈 흐라드바」다. 짐마차를 사슬로 이어 원형 진지를 만들고, 그 뒤에서 석궁과 화기를 쏘았다.
마차에 판자를 덧대 방패로 삼았다. 바퀴 사이는 널빤지로 막았다.
기병이 돌격해도 마차 벽을 넘지 못했다. 말이 멈추면 그때 갈고리 창으로 끌어내렸다.
화기를 대량으로 썼다. 「후프니체」라는 휴대용 총이 여기서 나왔다 — 지금 영어 「하위처(곡사포)」의 어원이다.
농민이 기사를 이길 수 있게 됐다.
지슈카는 애꾸눈이었고, 1421년 남은 눈마저 잃었다. 그 뒤에도 지휘했다.
십자군을 다섯 번 물리쳤다.
【그래서】 1424년 지슈카가 역병으로 죽었다.
그의 부대는 스스로를 「고아들」이라 불렀다.
후스파가 안에서 갈렸다. 온건파(우트라크비스트)와 급진파(타보르파)다.
1434년 리파니에서 온건파가 급진파를 꺾었다. 온건파가 교회와 타협했다.
성찬에서 잔을 받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남은 것】 유럽에서 처음으로 종교적 소수가 무력으로 자기 신앙을 지켜 낸 사례로 꼽힌다.
100년 뒤 루터가 후스의 글을 읽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후스파였는데 몰랐다.」
루터가 살아남은 것은 후원자와 인쇄술 덕이다. 후스에게는 둘 다 없었다.
체코에서 지슈카는 국민적 영웅이다. 프라하 비트코프 언덕에 그의 기마상이 서 있다 —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 기마상 가운데 하나다.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후스의 죽음에 유감을 표했다. 584년 만이다.
지도에서 보기: 14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장미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