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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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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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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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공룡

대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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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흑사병 이후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지자 노동력이 귀해지고 농노제가 흔들렸다. 몽골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오스만과 명이 들어섰다.

한반도

조선 전기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전쟁 2건

백년전쟁1337 – 1453
잉글랜드 vs 프랑스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잉글랜드 왕과, 대륙에 남은 잉글랜드 영지를 거두려는 프랑스 왕이 부딪혔다. 플랑드르의 모직 이권도 걸려 있었다.

크레시 1346푸아티에 1356아쟁쿠르 1415오를레앙 1429카스티용 1453

결과116년 만에 프랑스가 대륙에서 잉글랜드를 몰아냈다. 양국 모두 국민 의식이 생겨났다.

116년 · 흑사병과 겹쳐 양국 인구가 크게 줄었다
후스 전쟁1419 – 1434
후스파 vs 신성로마제국

얀 후스가 화형당하자 보헤미아가 일어섰다. 교황이 다섯 차례 십자군을 보냈다.

비트코프쿠트나호라리파니

결과지슈카가 수레를 둥글게 세워 성벽처럼 쓰고 그 안에서 초기 화기를 쐈다. 농민이 기사단을 깬 것이다. 다섯 차례의 십자군이 모두 실패했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11명

영락제정치1421 · 베이징 천도와 정화 원정을 명한 명의 3대 황제
1360 – 1424, 재위 1402 – 1424

조카의 제위를 빼앗고 자금성을 지었다. 정화의 대함대를 인도양으로 보내고 몽골 원정에 다섯 번 나섰다.

  • 정난의 변으로 즉위(1402)
  • 베이징 천도, 자금성 완공(1421)
  • 정화의 남해 원정, 「영락대전」 편찬
얀 후스사상1415 · 루터보다 100년 앞선 사람
1372 무렵 – 1415

프라하에서 면벌부와 교회의 부를 비판했다. 안전을 보장받고 공의회에 갔다가 화형당했다. 그를 따르던 이들이 일어나 15년을 싸웠다.

  • 교회 비판 — 루터보다 102년 앞섬
  • 1415년 콘스탄츠에서 화형
  • 후스 전쟁 — 농민이 수레로 진을 쳐 기사단을 깼다
잔 다르크장군1429 · 오를레앙의 처녀
1412 – 1431

열일곱에 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다. 2년 뒤 화형당했다.

  • 오를레앙 포위를 풂 1429
  •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성사
  • 루앙에서 화형
황희정치1431 · 조선의 재상
1363 – 1452

18년을 영의정으로 있었다.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해 유배됐다가 세종이 다시 불렀다. 반대했던 사람을 쓴 것이다.

  • 영의정 18년
  • 세종의 치세를 실무로 떠받침
  •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정화탐험1405 · 일곱 차례 인도양을 항해한 명의 환관 제독
1371 – 1433 무렵

콜럼버스보다 90년 앞서 수백 척의 대함대로 동아프리카까지 갔다. 그러나 명은 항해를 멈추고 배를 태웠다.

  • 남해 원정 7회(1405–1433)
  • 말라카·캘리컷·호르무즈·말린디 방문
  • 기린을 베이징에 데려옴
장영실과학1434 · 관노 출신의 기술자
1390 무렵 – ?

어머니가 관기였다. 세종이 신분을 넘어 썼다. 스스로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와 비의 양을 재는 그릇을 만들었다.

  • 자격루 — 스스로 치는 물시계
  • 측우기 — 세계 최초의 정량 강우 측정
  • 혼천의·앙부일구
  • 임금의 가마가 부서져 파직된 뒤 기록이 끊긴다
울루그 베그과학1437 · 천문대를 세운 정복자의 손자
1394 – 1449

티무르의 손자인데 별을 봤다. 반지름 40미터 육분의로 항성 1,018개의 자리를 재고 1년의 길이를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계산했다. 오차가 1분 이내다.

  • 사마르칸트 천문대
  • 항성 목록 1,018개
  • 종교 세력의 반발로 아들에게 살해
파차쿠텍정치1438 · 세상을 뒤집는 자
1418 무렵 – 1471 무렵

찬카족이 쳐들어왔을 때 아버지와 형은 달아났고 그는 남아 막았다. 그 뒤 90년 만에 에콰도르에서 칠레까지 4천 킬로미터를 아우르는 나라를 만들었다.

  • 쿠스코를 다시 설계
  • 4만 킬로미터 도로망
  • 마추픽추를 지은 것으로 본다
티무르장군1400 · 사마르칸트의 정복자
1336 – 1405

칭기즈 칸의 혈통이 아니어서 칸을 칭하지 못하고 사위라 했다. 35년을 정복만 했다. 1402년 오스만의 술탄을 사로잡아,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50년을 더 살았다.

  • 앙카라에서 오스만 술탄 생포
  • 사마르칸트를 세계의 중심으로
  • 5대손 바부르가 무굴을 세운다
세종정치1443 · 조선 4대 왕
1397 – 1450

백성이 쓸 문자를 만들었다. 측우기와 자격루, 농사직설도 이 시대다.

  • 훈민정음 창제 1443
  • 측우기·자격루·칠정산
  • 4군 6진 개척
정도전사상1394 · 조선을 설계한 사람
1342 – 1398

이성계를 찾아가 새 나라를 함께 그렸다. 한양의 궁궐과 사대문 이름을 유교의 덕목에서 따 지었다. 왕이 아니라 재상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썼다.

  • 조선경국전 — 나라의 설계도
  • 한양 천도와 경복궁·사대문 작명
  • 재상 중심 정치론
  • 1398년 이방원에게 살해

그 무렵의 사건

1420
사마르칸트 천문대
1년의 길이를 1분 오차로 계산했다.
울루그 베그가 반지름 40미터의 육분의를 지어 별을 쟀다. 항성 1,018개의 자리를 담은 목록은 이후 200년간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 그가 살해된 뒤 천문대는 헐렸고 20세기에 땅속에서 다시 발견됐다.
1405
정화의 남해 원정
영락제의 명으로 환관 정화가 300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떠났다.
첫 항해에 2만 7천 명이 탔고 배 중에는 길이 100m가 넘는 보선도 있었다 —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그 10분의 1이었다. 참파·자바·말라카·실론·캘리컷을 거쳐 이후 항해는 호르무즈와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닿았고, 기린이 베이징에 왔다. 28년간 일곱 차례 뒤 명은 바다에서 물러났고 기록을 태웠다. 정복이 아닌 위세의 항해였다는 점이 유럽의 대항해와 다르다.
1436
피렌체 르네상스
브루넬레스키의 돔이 완성됐다. 메디치의 돈과 고전의 재발견이 미술과 학문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
1436년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거대한 돔이 발판 없이 벽돌을 쌓는 새 공법으로 완성됐다. 같은 도시에서 마사초는 원근법으로 그렸고, 도나텔로는 천 년 만에 나체 청동상을 만들었으며, 브루니는 키케로를 본떠 시민의 삶을 찬미했다. 은행가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플라톤 전집 번역과 도서관에 돈을 댔다.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가 이 도시에서 자란다.
1398
왕자의 난
조선 건국 직후, 이방원(태종)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형제와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는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는데, 정도전이 재상 중심의 정치를 구상하며 이를 뒷받침했다. 개국 공신이면서도 후계에서 밀려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1398년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1차 왕자의 난). 이 일로 태조는 실의에 빠져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후 넷째 형 방간이 왕위를 노리고 이방원과 충돌하자, 이방원은 다시 이를 진압했다(1400년, 2차 왕자의 난). 결국 정종이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했고, 그는 곧이어 사병을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을 밀어붙였다.
1443
훈민정음
세종이 백성이 쓸 문자를 만들었다. 3년 뒤 반포한다.
글을 아는 사람의 범위가 근본적으로 넓어졌다.
1443
4군 6진 개척
세종은 최윤덕과 김종서를 보내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의 국경으로 확정했다.
당시 압록강·두만강 유역은 여진족이 자주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는 불안정한 접경지였다. 세종은 최윤덕에게 압록강 방면을, 김종서에게 두만강 방면을 맡겨 여진족을 토벌하고 각각 4개의 군(4군)과 6개의 진(6진)을 설치하게 했다. 이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선이 조선의 국경으로 확정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한반도 국경선의 원형이 되었다. 세종은 이와 함께 삼남 지방의 백성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펴 새 영토를 안정적으로 지키게 했다.

교역로 2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후스 전쟁

전쟁 · 1419 · 짐마차로 만든 요새

얀 후스가 화형당하자 보헤미아가 일어섰다. 교황이 다섯 차례 십자군을 보냈다. 지슈카가 수레를 둥글게 세워 성벽처럼 쓰고 그 안에서 초기 화기를 쐈다. 농민이 기사단을 깬 것이다. 다섯 차례의 십자군이 모두 실패했다.

【그때 그 자리】 1415년 얀 후스가 콘스탄츠에서 화형됐다.

황제가 준 안전 통행증을 받고 갔는데 갇혔고, 철회를 거부하자 태워졌다.

보헤미아가 들끓었다. 귀족 452명이 항의 서한에 서명했다.

1419년 프라하에서 시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졌다.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이다.

【왜 그렇게 됐나】 요구는 네 가지였다. 「프라하 4개조」다.

설교의 자유, 성찬에서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줄 것, 성직자의 세속 재산 몰수, 중대한 죄를 신분에 관계없이 처벌할 것.

두 번째가 상징이 됐다. 그전까지 잔은 사제만 들었다 —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표시였다.

그래서 후스파의 깃발에 성작(잔)이 그려졌다.

교황과 황제 지기스문트가 십자군을 선포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상대로 한 십자군이다.

【어떻게 흘렀나】 얀 지슈카가 지휘했다.

농민과 장인이 주력이었다. 기사 계급이 거의 없었다.

훈련된 중기병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만들었다.

「보즈 흐라드바」다. 짐마차를 사슬로 이어 원형 진지를 만들고, 그 뒤에서 석궁과 화기를 쏘았다.

마차에 판자를 덧대 방패로 삼았다. 바퀴 사이는 널빤지로 막았다.

기병이 돌격해도 마차 벽을 넘지 못했다. 말이 멈추면 그때 갈고리 창으로 끌어내렸다.

화기를 대량으로 썼다. 「후프니체」라는 휴대용 총이 여기서 나왔다 — 지금 영어 「하위처(곡사포)」의 어원이다.

농민이 기사를 이길 수 있게 됐다.

지슈카는 애꾸눈이었고, 1421년 남은 눈마저 잃었다. 그 뒤에도 지휘했다.

십자군을 다섯 번 물리쳤다.

【그래서】 1424년 지슈카가 역병으로 죽었다.

그의 부대는 스스로를 「고아들」이라 불렀다.

후스파가 안에서 갈렸다. 온건파(우트라크비스트)와 급진파(타보르파)다.

1434년 리파니에서 온건파가 급진파를 꺾었다. 온건파가 교회와 타협했다.

성찬에서 잔을 받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남은 것】 유럽에서 처음으로 종교적 소수가 무력으로 자기 신앙을 지켜 낸 사례로 꼽힌다.

100년 뒤 루터가 후스의 글을 읽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후스파였는데 몰랐다.」

루터가 살아남은 것은 후원자와 인쇄술 덕이다. 후스에게는 둘 다 없었다.

체코에서 지슈카는 국민적 영웅이다. 프라하 비트코프 언덕에 그의 기마상이 서 있다 —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 기마상 가운데 하나다.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후스의 죽음에 유감을 표했다. 584년 만이다.

지도에서 보기: 14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장미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