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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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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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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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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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헬레니즘 왕국들

알렉산드로스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부하 장군들이 제국을 나눠 가졌다. 셀레우코스·프톨레마이오스·안티고노스 왕조가 서로 싸우는 동안 서쪽에서 로마가 올라왔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2건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 – BC 241
로마 vs 카르타고

시칠리아의 용병 집단이 로마와 카르타고 양쪽에 도움을 청하면서, 이탈리아를 막 통일한 로마가 처음으로 바다 건너에 발을 들였다.

밀라이 BC 260에크노무스 BC 256아이가테스 제도 BC 241

결과로마가 함대를 새로 만들어 이겼다. 시칠리아가 첫 해외 속주가 됐다.

23년 · 바다를 몰랐던 로마가 함대 700척 가까이 잃으며 배웠다
칼링가 전쟁BC 261
마우리아 vs 칼링가

아소카가 동쪽 해안의 칼링가를 정복했다. 마우리아가 아직 삼키지 못한 마지막 큰 땅이었다.

칼링가 정복

결과10만이 죽고 15만이 끌려갔다. 아소카가 직접 새긴 비문에 깊이 슬퍼한다고 적혀 있다. 이긴 자가 자기 승리를 후회한 기록은 드물다. 그는 이 뒤로 불교로 돌아섰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아소카정치BC 260 · 이기고 나서 후회한 왕
BC 304 – BC 232

칼링가 정복에서 10만이 죽는 것을 보고 무력을 버렸다. 이후 불교를 후원하고 바위와 돌기둥에 자기 반성을 새겼다.

  • 칼링가 전쟁 후 무력 포기 선언
  • 암벽 칙령 — 왕이 자기 잘못을 새긴 드문 기록
  • 불교를 스리랑카·중앙아시아로 전파
아리스타르코스과학BC 270 · 천문학자
BC 310 무렵 – BC 230 무렵

코페르니쿠스보다 먼저 지동설을 말하다

  • 태양이 지구보다 크다는 것을 계산
  • 최초의 태양중심설 제안
  • 당대엔 받아들여지지 못함
순자사상BC 250 · 성악설과 예치를 말한 유가의 현실주의자
BC 310 무렵 – BC 235 무렵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예와 학문으로 다듬어야 한다.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가 법가로 갔다.

  • 성악설 — 맹자의 성선설 반박
  • 예(禮)와 교육에 의한 교화
  • 「천론」 — 하늘은 인간사에 무관심
에라토스테네스과학BC 240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
BC 276 무렵 – BC 194 무렵

그림자만으로 지구 둘레를 재다

  • 그림자 각도로 지구 둘레 계산
  • 오차 몇 % 이내의 정확도
  • 지리학이라는 말을 처음 씀

그 무렵의 사건

BC 300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세상의 모든 책을 한곳에 모으려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항구에 들어오는 배의 책을 모두 필사했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여기서 지구 둘레를 오차 2%로 계산했고, 유클리드가 「원론」을 썼다.
BC 300
야요이 — 벼와 쇠가 건너오다
한반도에서 논농사와 금속이 함께 건너갔다.
조몬의 채집 생활이 논농사로 바뀌었다. 벼와 청동기와 철기가 한반도를 거쳐 규슈로 들어갔다. 사람이 모이고 잉여가 생기자 다투기 시작했고, 그 위에서 야마타이 같은 나라가 선다.
BC 221
진의 중국 통일
시황제가 처음으로 중국을 하나로 묶었다.
군현제와 문자 통일이 이후 2천 년 중국의 틀이 됐다.
BC 312
아피아 가도
길이 제국을 만든다.
로마 최초의 포장 간선도로. 자갈과 돌을 여러 층으로 깔아 비가 와도 군단이 하루 30km를 갔다. 이후 8만 km의 도로망이 지중해를 하나로 묶는다.
BC 214
만리장성 연결
진시황이 흉노를 막으려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이어 붙였다. 지금 남은 벽돌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것이다.
몽염 장군이 30만 병력과 죄수로 10년 동안 흙을 다져 쌓았다. 「맹강녀」 전설처럼 수많은 사람이 공사 중 죽었다. 한·북위·수를 거쳐 명나라가 몽골을 막으려 벽돌과 돌로 6천 km를 다시 세운 것이 오늘 관광객이 오르는 바다링이다. 달에서 보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장성은 국경이라기보다 농경과 유목의 경계 그 자체였다.
BC 194
위만조선 성립
연나라 출신 위만이 고조선 준왕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세력을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됐다.
중국이 전국시대 혼란과 진·한 교체기의 격변을 겪던 시기, 연나라 사람 위만은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해 왔다. 준왕은 그를 믿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자리를 맡겼는데, 위만은 그 병력을 발판 삼아 도읍 왕검성을 기습해 준왕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했다(기원전 194년 무렵). 쫓겨난 준왕은 뱃길로 남쪽으로 내려가 한(韓)의 땅에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위만은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했지만, 그 이전 단군·기자 계통과는 다른 새 왕조라는 뜻에서 오늘날 역사학계는 이를 「위만조선」이라 구분해 부른다. 위만조선은 이후 손자 우거왕 대에 이르러 한 무제의 침공으로 멸망했다(기원전 108년).

교역로 1개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제1차 포에니 전쟁

전쟁 · BC 264 · 육지의 나라가 바다를 배우다

시칠리아의 용병 집단이 로마와 카르타고 양쪽에 도움을 청하면서, 이탈리아를 막 통일한 로마가 처음으로 바다 건너에 발을 들였다. 로마가 함대를 새로 만들어 이겼다. 시칠리아가 첫 해외 속주가 됐다.

【그때 그 자리】 BC 264년이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막 통일했다. 배가 거의 없었다.

카르타고는 500년 동안 서지중해를 지배한 해양 국가다.

그 사이에 시칠리아가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시작은 사소했다.

메시나를 점거한 용병 집단(마메르티니)이 시라쿠사에게 몰리자, 카르타고와 로마 양쪽에 도움을 청했다.

카르타고가 먼저 들어갔다. 그러자 로마가 개입했다.

로마 원로원은 망설였다. 민회가 밀어붙였다 — 전리품에 대한 기대가 컸다.

【어떻게 흘렀나】 육지에서는 로마가 우세했다. 그런데 카르타고가 배로 보급하면 결판이 나지 않았다.

로마가 함대를 만들기로 했다. 좌초한 카르타고 군선 한 척을 본떠 두 달 만에 100척을 지었다고 폴리비오스가 적었다.

노 젓는 훈련은 육지에 의자를 늘어놓고 했다.

배는 만들어도 조선술과 항해술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냈다.

「코르부스(까마귀)」다. 뱃머리에 세운 다리인데, 끝에 갈고리가 달려 있다. 적선에 붙으면 떨어뜨려 갑판을 걸고, 그 위로 로마 보병이 건너간다.

해전을 육전으로 바꾼 것이다. BC 260년 밀라이에서 첫 승리를 거뒀다.

다만 코르부스는 무거워 배의 균형을 해쳤다. 폭풍에 함대를 통째로 잃는 일이 두 번 있었다 — 한 번에 배 280척과 사람 10만이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최대의 해난 사고로 꼽힌다.

【그래서】 23년을 끌었다. 양쪽 다 재정이 바닥났다.

로마 시민들이 사재를 털어 함대를 다시 만들었다. BC 241년 아이가테스 제도 해전에서 이겼다.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배상금을 물었다.

【남은 것】 시칠리아가 로마의 첫 속주가 됐다. 총독을 보내 세금을 걷는 방식이 여기서 시작된다.

카르타고는 배상금을 마련하지 못해 용병에게 급료를 못 줬다. 용병 반란이 3년 갔다.

그 틈에 로마가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빼앗았다. 조약에 없던 일이다.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가 에스파냐로 가서 새 기반을 만들었다.

그가 아홉 살 아들에게 로마를 영원히 미워하겠다는 맹세를 시켰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한니발이다.

1차 전쟁이 끝난 방식이 2차 전쟁을 불렀다.

지도에서 보기: BC 3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칼링가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