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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부유하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65년을 다퉜다.
결과화약·상비군·용병이 결합한 근대 전쟁의 실험장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혼란 속에서 쓰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전쟁으로 끝났다.
왜왕위 계승 내전으로 잉카가 갈라진 직후 피사로가 도착했다. 역병이 이미 인구를 크게 줄여둔 뒤였다.
결과황제 아타우알파가 처형되고 안데스의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었다.
왜잉카는 형제간 내전을 막 끝낸 참이었다. 아타우알파는 168명을 위협으로 보지 않았다.
결과광장으로 부른 뒤 기습해 왕을 사로잡았다. 몸값으로 방 하나를 금으로 채우게 하고도 죽였다. 1천만을 다스리던 나라가 왕 하나를 잃고 무너졌다.
형과 5년을 싸워 이긴 직후 168명의 에스파냐인에게 사로잡혔다. 몸값으로 방 하나를 금으로, 두 개를 은으로 채웠는데도 죽임을 당했다.
168명으로 카하마르카에서 황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방 하나 가득한 금을 받은 뒤 죽였다. 쿠스코가 무너지고 리마가 세워졌다.
여섯 번 결혼하고 두 왕비를 처형했다. 교황이 이혼을 거부하자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됐다.
에스파냐·네덜란드·오스트리아·나폴리·신대륙을 한 손에 쥐었다. 루터를 심문했고 프랑스와 오스만과 싸우다 지쳐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베오그라드와 로도스를 취하고 빈을 포위했다. 법전을 정비하고 이스탄불을 건축으로 채워 튀르크인은 그를 카누니(입법자)라 부른다.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피를 함께 받았다.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카불로 밀려났다가 인도로 내려갔다. 회고록을 직접 썼다.
풀과 벌레를 그렸다. 당시 여성의 그림이 남은 것 자체가 드물다. 아들 이이를 길렀다는 것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오래된 문제다.
덴마크가 주도하던 칼마르 동맹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며 근대 스웨덴 왕국의 시조가 됐다.
예정설과 엄격한 교회 규율. 그의 가르침은 네덜란드·스코틀랜드·뉴잉글랜드로 퍼져 근대 서구의 정신을 만들었다.
폴란드의 성직자이자 천문학자였다. 죽는 해에야 책을 냈다. 지구가 도는 편이 계산이 훨씬 단순하다는 것이 그의 근거였다.
스물다섯에 아즈텍의 마지막 지도자가 되어 80일 포위를 버텼다. 금을 어디 숨겼느냐며 발을 불에 지지는 고문을 받았다. 지금 멕시코에서 저항의 상징이다.
시신을 직접 해부해 갈레노스 이래 1,300년 된 오류를 바로잡았다.
수백 명의 병사와 원주민 동맹, 천연두로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했다. 아즈텍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세워졌다.
남아메리카 끝의 해협을 찾아 태평양에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에서 전사했으나 남은 배 한 척이 세비야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구 20만의 도시를 다스렸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에스파냐인을 궁에 들였다가 볼모가 됐고 성난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인쇄술을 타고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카잔과 아스트라한을 정복하고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했다. 동시에 친위 조직을 만들어 귀족을 학살했고, 화가 나 자기 아들을 때려 죽였다.
교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그리스어 신약을 펴냈다. 루터에게 길을 열었지만 분열은 거부했다.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 피렌체 외교관이 실직 후 쓴 얇은 책이 근대 정치학의 출발이 됐다.
조각가를 자처했으나 교황의 명으로 4년간 천장에 매달려 「천지창조」를 그렸고, 여든 넘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전쟁 · 1532 · 40년이 걸렸다
왕위 계승 내전으로 잉카가 갈라진 직후 피사로가 도착했다. 역병이 이미 인구를 크게 줄여둔 뒤였다. 황제 아타우알파가 처형되고 안데스의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그 자리】 1532년 카하마르카의 기습으로 황제가 잡혔다.
이듬해 처형됐고, 1533년 11월 피사로가 쿠스코에 들어갔다.
여기까지가 널리 알려진 부분이다. 그 뒤가 40년이다.
【왜 그렇게 됐나】 피사로가 처음에는 꼭두각시를 세웠다.
망코 잉카 유팡키다. 아타우알파의 이복동생으로, 에스파냐를 내전의 우군으로 여겼다.
곧 알았다. 에스파냐인들이 신전의 금을 뜯고 왕족 여자들을 취했다.
1536년 망코가 탈출해 봉기했다.
【어떻게 흘렀나】 10만이 넘는 군대로 쿠스코를 포위했다.
10개월을 갔다. 에스파냐인 190명이 성 안에서 버텼다.
리마도 동시에 포위됐다.
그런데 잉카군이 유지되지 못했다. 대부분이 농민이라 파종기가 되자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잉카 편에 서지 않은 부족들이 많았다. 카냐리와 차차포야스는 에스파냐를 도왔다.
망코가 물러나 빌카밤바에 자리를 잡았다. 안데스 동쪽 밀림 지대다.
거기서 36년을 버텼다. 「신 잉카 국가」라 부른다.
1572년 마지막 왕 투팍 아마루가 붙잡혀 쿠스코 광장에서 처형됐다.
【그래서】 정복자들끼리도 싸웠다.
피사로와 알마그로가 전리품을 두고 갈렸다. 알마그로가 처형됐고, 그 아들이 1541년 피사로를 암살했다.
에스파냐 왕이 보낸 총독을 정복자들이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20년 가까이 내전이 이어졌다.
【남은 것】 포토시 은광이 1545년 발견됐다.
잉카의 미타 제도를 에스파냐가 가져다 썼다. 마을마다 사람을 뽑아 광산에 보내는 강제 노동이다.
수은을 써서 은을 뽑았다. 수은 중독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죽은 자를 먹는 산」이라 불렸다.
그 은이 세비야로 갔고, 상당 부분이 다시 아시아로 흘러 중국의 은 수요를 채웠다. 세계 경제가 처음으로 하나로 이어진 지점으로 자주 꼽힌다.
잉카의 도로와 계단식 밭 상당수가 방치돼 무너졌다.
투팍 아마루의 이름은 남았다. 1780년 그 후손을 자처한 사람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고, 20세기에도 여러 저항 조직이 그 이름을 가져갔다.
케추아어는 지금도 800만 명이 쓴다.
지도에서 보기: 153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카하마르카 파니파트 1차 전투 테노치티틀란 함락 아즈텍 정복 찰디란 전투 위그노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