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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베르사유 체제가 패전국에 가혹했고 대공황이 겹쳤다. 의회 민주주의가 무너진 자리에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들어섰다.
국권을 잃고 35년. 3·1운동과 임시정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왜석유가 있으리라 믿은 그란차코 황무지를 두고 바다 없는 두 나라가 싸웠다. 스탠더드오일과 로열더치셸이 뒤에 있었다는 말이 돌았다.
결과파라과이가 대부분의 땅을 얻었다. 갈증과 질병으로 10만 명이 죽었고, 두 나라 모두 정치 혼란에 빠졌다. 정작 석유는 없었다.
왜선거로 선 공화정부에 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결과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를, 소련은 공화국을 도왔고 세계 각지에서 의용군이 모였다. 다음 전쟁의 예행이었다. 게르니카를 폭격기가 지운 날, 도시 폭격이 무엇인지 세상이 알았다.
왜만주를 이미 차지한 일본이 화북으로 밀고 들어갔다. 루거우차오의 우발적 총격이 전면전의 방아쇠가 됐다.
결과일본이 중국 본토로 밀고 들어갔다.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다.
왜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원한과 대공황이 나치를 키웠다. 거듭된 유화 정책이 폴란드 침공에서 한계에 닿았다.
결과6천만 명이 죽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식민제국들도 함께 무너졌다.
무솔리니의 침공에 맞서 제네바에서 「오늘은 우리, 내일은 당신들」이라 경고했다. 44년을 다스렸고 라스타파리는 그를 신으로 섬긴다.
불황엔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 그의 「일반이론」은 전후 30년 서방 경제정책의 교과서였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했다.
북벌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일본과 공산당 사이에서 싸우다 1949년 대륙을 잃었다. 타이완에서 계엄으로 26년을 다스렸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회화를 깨뜨렸고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상을 고발했다. 91년 동안 5만 점을 만들었다.
1936년 공화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3년간의 내전 끝에 승리했다. 1975년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권위주의 체제로 통치했다.
빈의 낙방 화가에서 독일 총통이 됐다.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으며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도 항복을 거부했다. 라디오 연설로 국민을 버티게 했다.
스물넷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한 번으로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한 것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과 도시국가를 정복·통합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왕이 됐다.
대공황을 뉴딜로 넘기고 전쟁으로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만주 명동촌에서 나 일본에서 옥사했다. 스물일곱이었다. 시집은 죽은 뒤에 나왔다.
소금 행진으로 비폭력 불복종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최초의 원자로를 가동하다
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뒤,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을 앞세운 폭압적 통치를 이어갔다. 아이티계 주민 수천~수만 명을 학살한 1937년 '파슬리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숙청으로 권력을 굳히고 독소전쟁을 이겼다. 전후 동유럽을 진영에 편입시켰다.
봄브라는 장치로 독일군 암호를 풀어냈다.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놓았지만 박해 속에 세상을 떠났다.
은하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측으로 밝혀 팽창 우주를 증명했다.
우연히 자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1944년 6월 6일 「출발」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으로는 한국전쟁을 끝내고 고속도로를 깔았으며 「군산복합체」를 경고했다.
파리에서 요리사로, 뉴욕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30년을 밖에서 지냈다. 1945년 독립선언문 첫머리에 미국 독립선언을 인용했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원리를 내놨다.
프로그램을 메모리에 저장하는 구조를 제시해 현대 컴퓨터의 틀을 잡았다.
일본 항복 이틀 뒤 자카르타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4년의 무력·외교전 끝에 네덜란드의 승인을 받아냈으나, 1965년 이후 수하르토에게 밀려났다.
그의 이름으로 중국과 태평양의 전쟁이 벌어졌다. 원폭 뒤 항복을 방송했고, 전범 재판을 피해 「상징」으로 남아 1989년까지 재위했다.
루스벨트가 급사해 82일 만에 대통령이 됐고 원폭 사용을 결정했다. 마셜 플랜과 나토, 한국전쟁 참전으로 냉전의 틀을 짰다.
로스앨러모스에서 3년 만에 폭탄을 만들었고, 첫 폭발을 보며 「나는 죽음이 되었다」를 떠올렸다. 수소폭탄에 반대하다 보안 청문회로 몰락했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는 방정식을 세우고, 양자역학의 역설을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짚었다.
노동자 계층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올라 산업화와 사회복지 확대를 추진했다. 부인 에바 페론('에비타')과 함께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일본 점령기와 그 이후 영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7년 영국과 독립 협정을 맺어냈으나, 같은 해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돼 독립(1948)을 직접 보지 못했다.
「자정의 종이 울릴 때 인도는 자유로 깨어난다」. 17년간 총리로 세속주의·사회주의·비동맹의 인도를 세웠다.
힌두-무슬림 통합의 대사였던 변호사가 두 민족론으로 돌아섰다. 파키스탄 건국 1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정보이론을 세우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장기 집권을 시도하다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파르티잔으로 나치를 몰아내고 소련 진영에서 이탈했다. 비동맹 운동을 이끌고 여섯 민족을 하나로 묶었으나 그가 죽자 나라도 갈라졌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아랍 5개국의 공격을 막아 냈다. 사막 키부츠에서 여생을 보냈다.
국공내전에서 이기고 톈안먼에서 건국을 선포했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뒤, 튀르크 독립전쟁을 이끌어 그리스와 연합국의 분할 시도를 막아냈다. 1923년 술탄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인천에 상륙해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확전 문제로 해임됐다.
불가촉천민으로 나 미국과 영국에서 박사가 됐다. 독립 인도의 헌법 초안을 썼고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금지 조항으로 넣었다. 간디와 이 문제로 정면으로 부딪쳤다.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첫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나중엔 그의 꼭두각시가 됐고,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거꾸로 매달렸다.
만주 항일 유격대 출신으로 소련의 후원 아래 정권을 세웠다. 남침으로 300만이 죽는 전쟁을 일으켰고 3대 세습 체제의 시조가 됐다.
51번 사진을 찍은 사람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독립군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 암살당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열일곱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졌다.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군을 조직했다.
DNA 이중나선을 밝히다
생명의 중심원리를 제시하다
민족자결을 말해 3·1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정작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26년간 총리로 마오의 그늘에서 나라를 굴렸다. 제네바와 반둥에서 신중국을 세계에 소개했고 닉슨을 맞았으며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줄이려 애썼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1952년 군주정을 무너뜨린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 권력을 잡았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았지만 외교적으로 승리하며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제20차 당대회 비밀 연설로 스탈린 숭배를 깼다. 스푸트니크를 쏘고 유엔에서 구두를 두드렸으며 쿠바 위기 뒤 실각했다.
영국령 골드코스트를 이끌어 가나로 독립시켰다. 범아프리카주의를 내걸었으나 1966년 외유 중 쿠데타로 쫓겨났다.
1958년 프랑스가 옛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제안한 '프랑스 공동체' 잔류 국민투표에서, 기니만이 유일하게 거부표를 던지도록 이끌어 즉각 완전 독립을 얻어냈다. 이후 26년간 권위주의적으로 기니를 통치했다.
1940년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다」라고 방송했다. 알제리 전쟁의 혼란 속에 돌아와 대통령제 헌법을 만들었다.
당장 싸우는 것보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봤다. 미국에서 동포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웠다.
전자가 정해진 궤도만 돈다는 원자모형으로 양자역학의 문을 열었다.
바티스타 독재를 게릴라전으로 무너뜨리고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언했다. 미국의 코앞에서 반세기 가까이 권좌를 지켰다.
모델 T를 조립라인에서 93분에 한 대씩 만들어 값을 세 배 낮췄다. 노동자에게 하루 5달러를 주어 자기 차를 사게 했다.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다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을 이끌었다. 장관직을 버리고 볼리비아 밀림에서 게릴라로 싸우다 처형됐다.
1959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비폭력으로 티베트 자치를 호소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세계의 종교 지도자가 됐다.
대륙이 움직인다고 말한 사람
삼민주의를 내걸고 열 번 봉기해 열 번 실패했지만 신해혁명으로 2천 년 제정을 끝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그를 국부로 받든다.
남부 농민들을 이끌고 빼앗긴 공유지를 되찾으려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약속은 미뤄졌고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매복에 걸려 죽었다.
원자핵을 발견하다
탕가니카(오늘날 탄자니아 본토) 독립을 이끌고 잔지바르와의 통합으로 탄자니아를 세운 초대 대통령. '우자마(공동체 정신)'를 내세운 독자적 아프리카 사회주의 노선으로 농촌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경제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108분의 비행 뒤 「지구는 푸르다」고 말했고 세계의 영웅이 됐다.
43세의 최연소 당선. 「국가가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로 시작했고, 달 착륙을 약속했으며, 댈러스에서 총에 맞았다.
해당 없음
전쟁 · 1936 · 다음 전쟁의 예행연습
선거로 선 공화정부에 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를, 소련은 공화국을 도왔고 세계 각지에서 의용군이 모였다. 다음 전쟁의 예행이었다. 게르니카를 폭격기가 지운 날, 도시 폭격이 무엇인지 세상이 알았다.
【그때 그 자리】 1936년이다. 5년 전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섰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이 이겼다. 표 차이는 크지 않았다.
나라가 갈려 있었다. 토지 개혁, 교회의 지위,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가 모두 쟁점이었다.
정치 폭력이 잦았다. 7월에 우파 지도자 칼보 소텔로가 살해되자 군부가 움직였다.
【왜 그렇게 됐나】 7월 17일 모로코 주둔군이 봉기했다.
쿠데타가 절반만 성공했다. 일부 도시는 군이 장악했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자와 충성 부대가 막았다.
나라가 둘로 갈렸다. 그것이 내전이 된 이유다.
그리고 곧 국제전이 됐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국민 진영을 도왔다. 히틀러가 수송기를 보내 모로코의 병력을 본토로 실어 날랐다 — 역사상 첫 대규모 공수 작전이다.
소련이 공화 진영에 무기를 팔았다. 대가로 스페인 은행의 금 준비 상당 부분을 가져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불개입을 선언했다. 그런데 그 정책이 실질적으로 한쪽에만 불리하게 작용했다 — 독일과 이탈리아는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
【어떻게 흘렀나】 세계 각국에서 의용병이 왔다. 국제여단이다. 53개국에서 3만 5천 명 이상이다.
조지 오웰이 그중 하나다. 목에 총을 맞고 살아남아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
헤밍웨이가 종군했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가 폭격당했다. 장날 오후였다.
독일 콘도르 군단이 세 시간 넘게 융단 폭격했다. 민간인을 목표로 한 공중 폭격의 이른 사례로 꼽힌다.
피카소가 그 소식을 듣고 두 달 만에 「게르니카」를 그렸다.
공화 진영은 안에서도 싸웠다. 공산당과 무정부주의자와 통일노동자당이 부딪쳤다. 1937년 바르셀로나에서 서로 총을 쐈다.
【그래서】 1939년 3월 마드리드가 함락됐다.
프랑코가 집권해 1975년까지 36년을 다스렸다.
사망자가 5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니라 후방의 처형이다.
전쟁 뒤에도 계속됐다. 수만 명이 처형되고 수십만이 수용소에 갇혔다.
【남은 것】 새 무기와 전술이 시험됐다. 급강하 폭격기, 전차와 항공기의 협동, 도시 폭격이다.
그것이 3년 뒤 그대로 쓰였다.
스페인은 오래 이 기억을 덮었다. 1977년 「망각 협정」으로 과거를 묻지 않기로 했다.
2007년에야 「역사 기억법」이 통과됐다. 집단 매장지 발굴이 시작됐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2019년 프랑코의 유해가 국립묘지 격의 「전몰자의 계곡」에서 이장됐다.
「게르니카」는 프랑코가 죽은 뒤에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피카소가 그렇게 유언했다.
지도에서 보기: 193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차코 전쟁 태평양전쟁 국공내전 인도차이나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