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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셀주크 튀르크가 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오자 동로마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섰다.
결과황제가 사로잡히고 아나톨리아를 잃었다. 이 패배가 십자군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재정난과 군사력 약화를 제도로 풀려 했다. 개혁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가 물러나자 대부분 폐지됐다.
노르망디 공의 사생아로 태어나 잉글랜드 왕이 됐다. 헤이스팅스 한 번의 전투가 잉글랜드의 지배층과 언어를 통째로 갈았다.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몽계필담을 쓴 박학한 관료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이 군중에서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전쟁 · 1071 · 셀주크 vs 동로마
셀주크 튀르크가 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오자 동로마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섰다. 황제가 사로잡히고 아나톨리아를 잃었다. 이 패배가 십자군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그때 그 자리】
11세기 중반 비잔티움은 오랜만에 안정돼 보였다. 바실리오스 2세가 1025년까지 다스리며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영토를 넓혔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후계 다툼과 궁정 정치로 50년이 흘렀다. 특히 지방의 자유농민 병사를 기반으로 한 테마 제도가 무너졌다. 대귀족이 농민의 땅을 사들이면서 병력을 낼 사람이 줄었다. 대신 용병을 썼다.
동쪽에서 셀주크 튀르크가 왔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해 온 유목 세력으로, 1055년 바그다드에 들어가 아바스 칼리프에게서 술탄 칭호를 받았다.
【왜 그렇게 됐나】
1068년 로마노스 4세가 황제가 됐다. 군인 출신으로, 동쪽 국경의 약탈을 끝내겠다며 원정에 나섰다.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원래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치려던 참이었다. 비잔티움과 큰 싸움을 벌일 뜻이 없었다.
두 사람 다 이 전투를 계획하지 않았다.
【어떻게 흘렀나】
1071년 8월 26일 지금의 튀르키예 동부 만지케르트 부근에서 마주쳤다.
비잔티움군은 혼성이었다.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노르만과 페체네그와 우즈 용병이 섞여 있었다. 지휘 계통이 하나가 아니었다.
셀주크는 유목민 전술을 썼다.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활을 쏘며 물러나다 추격해 오면 흩어지고 다시 모여 옆을 쳤다.
로마노스가 하루 종일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다. 해가 지자 회군 명령을 내렸다.
이때 후위를 맡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명령을 잘못 전했거나 일부러 어겼다. 그는 황제의 정적인 두카스 가문 사람이었다. 후위가 그대로 전장을 떠났다.
앞의 군대가 고립됐다. 용병들도 달아났다. 황제가 사로잡혔다.
알프 아르슬란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예를 갖춰 대접하고 배상금과 조약을 조건으로 풀어줬다.
【그래서】
돌아온 로마노스를 기다린 것은 반역이었다. 두카스 가문이 이미 새 황제를 세웠다. 그는 폐위되고 눈이 뽑혀 죽었다.
이후 비잔티움에서 내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내전에서 각 진영이 셀주크 용병을 불러들였다.
아나톨리아가 그렇게 열렸다. 전투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 그 뒤 10년의 내전에서 잃었다.
아나톨리아는 비잔티움 병력과 세수의 주요 공급지였다. 이 땅을 잃자 제국의 몸이 반으로 줄었다.
【남은 것】
1095년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방에 용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그것을 성지 탈환 원정으로 바꿔 선포했다. 십자군이 여기서 시작된다.
즉 만지케르트가 없었다면 십자군도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 길게 보면 이 전투가 오늘의 튀르키예를 만들었다. 그전까지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어를 쓰는 기독교 지역이었다. 이후 튀르크계 인구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언어와 종교가 바뀌었다. 지금 튀르키예 공화국은 이 전투를 나라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기린다.
패인은 적의 강함보다 안의 분열이었다. 후위 지휘관이 정치적 이유로 전장을 떠난 것, 용병이 달아난 것, 그리고 돌아온 황제를 자기편이 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