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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프랑스 혁명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민'이라는 새로운 정치 단위를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그 이념을 총검에 실어 유럽 전역에 퍼뜨렸다.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이 겹쳤다. 서양 선박이 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문을 닫아걸었다.
왜하이데르 알리와 아들 티푸 술탄의 마이소르가 프랑스와 손잡고 남인도에서 영국에 맞섰다.
결과네 차례 전쟁 끝에 티푸 술탄이 성벽에서 죽었다. 로켓 부대로 영국군을 놀라게 한 마이소르는 영국의 위성국이 됐다.
왜무굴이 무너진 뒤 인도 중부를 지배하던 마라타 동맹의 내분에 회사가 개입했다.
결과웰즐리(뒷날 웰링턴)가 아사예에서 이기고 세 번째 전쟁으로 동맹이 해체됐다. 이로써 영국은 인도 아대륙의 실질적 지배자가 됐다.
왜혁명 프랑스를 무너뜨리려는 왕정 국가들의 동맹과, 그 포위를 깨려는 나폴레옹의 팽창이 맞물렸다.
결과23년간 유럽 지도가 계속 뒤집혔다. 워털루에서 끝나고 빈 체제가 들어섰다.
덕 없는 공포는 해롭고 공포 없는 덕은 무력하다. 혁명을 지키려 단두대를 돌리다 자신도 거기서 죽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14세 소녀가 사치의 상징이 됐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은 하지 않은 말이지만 민중의 분노는 진짜였다.
정밀한 저울로 연소와 질량 보존을 증명했다. 프랑스 혁명 중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우두 고름을 접종해 천연두를 막는 첫 백신을 만들었다.
다섯 살에 작곡하고 여덟 살에 교향곡을 썼다.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마술피리」와 미완의 「레퀴엠」을 남기고 빈에서 빈곤 속에 죽었다.
마이소르의 왕으로 네 차례 영국과 싸웠다. 로켓 무기를 실전에 썼고, 그 기술이 영국으로 건너가 콩그리브 로켓이 됐다.
최초의 전지를 만들다
수원 화성에 거중기를 만들어 썼다. 천주교 문제로 18년간 강진에 유배됐고, 그 유배지에서 500권을 썼다.
정수론·통계학·측지학까지 남긴 업적이 방대해 수학자들의 왕이라 불린다.
노예로 태어나 프랑스·에스파냐·영국군을 차례로 물리쳤다. 나폴레옹에게 붙잡혀 알프스 감옥에서 죽었으나 이듬해 아이티가 독립했다.
원자설을 세우다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틀로 본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혁명의 이념을 총검에 실어 유럽에 퍼뜨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국민국가가 자랐다.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화원이면서 씨름하고 서당에서 우는 아이를 그렸다. 그림의 주인공이 왕에서 사람으로 내려온 순간이다.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썼다. 오랑캐라 부르던 나라가 실제로는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적었다.
트라팔가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꺾고 전사했다. 영국의 제해권이 굳어졌다.
독립을 이끌고 왕이 되기를 거절했다. 두 번의 임기 뒤 스스로 물러났다.
규장각을 세우고 수원 화성을 쌓았다. 탕평으로 붕당을 눌렀다.
「보이지 않는 손」— 각자가 자기 이익을 좇을 때 사회 전체가 부유해진다. 분업과 자유무역을 설명한 이 책이 자본주의의 경전이 됐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럽을 울렸고 60년에 걸쳐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시인이자 정치가, 과학자였다.
청력을 잃고 유서를 썼지만 「운명」을 목덜미로 붙잡겠다며 일어섰다. 9번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는 유럽연합의 노래가 됐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썼으면서 노예 600명을 소유했다.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나라를 두 배로 넓혔다.
인쇄공에서 시작해 피뢰침을 발명하고 프랑스를 독립전쟁의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독립선언과 헌법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인물 중 하나다.
분리 응축기로 증기기관의 효율을 세 배 올렸고 회전 운동으로 바꿔 공장과 기차를 움직였다. 힘의 단위 「와트」가 그의 이름이다.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팔 수 없다고 했다. 흩어진 부족을 하나의 연합으로 묶어 서쪽 확장을 막으려 했다. 1813년 전사하며 그 구상도 끝났다.
기체 속 입자 수의 법칙
스페인, 이어 이 지역을 점령한 브라질(포르투갈)에 맞서 게릴라식 저항운동을 이끌며 우루과이 독립운동의 기틀을 놓았다. 정작 자신은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파라과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세 차례 항해로 태평양의 해안선을 그렸다. 감귤로 괴혈병을 막아 긴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가 그린 지도가 곧 식민의 지도가 됐다.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고 워털루에서 프로이센군과 함께 나폴레옹의 마지막 도박을 끝냈다. 뒤에 총리도 지냈다.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을 왕정과 세력 균형으로 되돌렸다. 33년간 혁명을 억눌렀으나 1848년 혁명에 쫓겨났다.
아르헨티나에서 군대를 만들어 눈 덮인 안데스를 넘어 칠레를 해방하고 배로 페루로 갔다. 볼리바르와 만난 뒤 지휘권을 넘기고 스스로 유럽으로 떠났다.
던지는 창 대신 짧은 찌르는 창을 쓰게 하고, 소뿔 모양으로 감싸는 진형을 만들었다. 작은 부족을 10년 만에 남아프리카 최강으로 바꿨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유럽의 공산품 → 아프리카의 노예 → 아메리카의 설탕·면화 → 유럽. 세 대륙이 하나의 경제로 묶였다.
전쟁 · 1792 · 프랑스 vs 대프랑스 동맹 (영국·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
혁명 프랑스를 무너뜨리려는 왕정 국가들의 동맹과, 그 포위를 깨려는 나폴레옹의 팽창이 맞물렸다. 23년간 유럽 지도가 계속 뒤집혔다. 워털루에서 끝나고 빈 체제가 들어섰다.
【그때 그 자리】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주변 왕국들이 혁명이 번질까 두려워 연달아 동맹을 맺고 쳐들어왔다.
프랑스는 국민개병으로 맞섰다. 1793년 총동원령으로 병력이 100만에 가까워졌다.
이것이 전쟁의 성격을 바꿨다. 그전까지 유럽의 전쟁은 왕이 고용한 직업 군인들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벌이는 일이었다. 병사가 비싸서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징집된 시민군은 달랐다. 숫자가 많고 사기가 높으며 나라가 자기 것이라 믿었다. 손실을 감수하고 밀어붙일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나폴레옹은 이 새 군대를 다루는 법을 알았다.
군단 체제를 썼다. 각 군단이 보병과 기병과 포병을 갖춰 독립적으로 싸울 수 있게 했다. 흩어져 행군하다 전투 직전에 모인다. 흩어지면 보급이 쉽고 모이면 강하다.
포병 장교 출신이라 대포를 집중 운용했다. 결정적인 지점에 화력을 몰았다.
그리고 빨랐다. 병사들이 하루에 30킬로미터 이상을 걸었다. 상대가 대응하기 전에 도착했다.
【어떻게 흘렀나】
1805년 아우스터리츠가 그의 대표작이다. 일부러 유리한 고지를 비워 두어 적을 끌어들인 뒤 안개가 걷히는 순간 중앙을 갈랐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이 무너졌다.
1806년 예나에서 프로이센을 하루에 꺾었다. 1807년 러시아와 강화했다.
유럽 대부분이 그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형제들을 각국 왕으로 앉혔다.
두 가지가 그를 무너뜨렸다.
하나는 에스파냐다. 1808년 침공했는데 정규군을 이겨도 끝나지 않았다. 주민들이 게릴라전을 벌였다. 게릴라라는 말이 이때 생겼다. 6년간 병력이 소모됐다. 그는 이를 에스파냐 궤양이라 불렀다.
다른 하나가 대륙봉쇄령이다. 영국을 굴복시키려 유럽 전체가 영국과 교역을 끊게 했다. 그런데 영국보다 유럽 대륙이 먼저 상했다. 이를 어기는 나라를 치느라 힘이 흩어졌다.
러시아가 봉쇄를 어기자 1812년 60만을 이끌고 침공했다. 러시아군은 싸우지 않고 물러나며 모든 것을 태웠다. 모스크바에 들어갔으나 도시가 비어 있었고 곧 불탔다. 겨울에 후퇴하며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연합군에 패했다. 1814년 퇴위해 엘바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100일을 다스리고 1815년 워털루에서 끝났다.
【그래서】
1815년 빈 회의로 유럽의 질서가 다시 짜였다. 혁명 이전으로 돌리자는 정통주의와 강대국 사이의 균형이 원칙이었다.
이 체제가 100년간 유럽에 큰 전쟁이 없게 했다는 평가가 있다. 동시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누른 반동 체제라는 비판이 함께 있다.
【남은 것】
전쟁으로 300만에서 600만이 죽었다. 그런데 함께 퍼진 것이 있다.
그의 군대가 지나간 곳마다 봉건적 특권과 영주 재판권이 사라졌다. 나폴레옹 법전이 시행돼 법 앞의 평등과 사유재산 보장이 문서가 됐다.
동시에 그는 민족주의를 깨웠다. 짓밟힌 독일과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에서 우리도 하나의 국민이라는 감각이 생겼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이탈리아 통일의 씨앗이 여기 있다.
군사적으로는 총력전의 원형이 됐다. 클라우제비츠가 이 전쟁을 보고 전쟁론을 썼다. 나라 전체가 싸움에 동원되는 방식이 이후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지도에서 보기: 1783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피라미드 전투 머스킷 전쟁 미국 독립전쟁 마라타 전쟁 마이소르 전쟁 그리스 독립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