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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100년. 그사이 몽골이 여섯 차례 침입했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했다.
왜문신이 무신을 천대하는 관행이 쌓였다. 의종의 보현원 행차에서 폭발했다.
결과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쳐 최씨 정권이 60년을 이었다. 몽골 침입에 강화도로 옮겨 항전했고,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까지 물러나며 끝까지 싸웠다.
왜전해에는 프리트비라지가 이겼다. 이듬해 무함마드 고리가 다시 왔다.
결과이 한 번으로 북인도가 열렸다. 델리 술탄국이 서고 이후 600년간 이슬람 왕조가 북인도를 다스린다.
재위 10년 중 영국에 머문 것은 반년. 십자군에서 살라딘과 싸우고 돌아오다 붙잡혀 거액의 몸값이 치러졌다.
사서에 주석을 달고 이(理)와 기(氣)로 세계를 설명했다. 그의 학문이 조선의 국교가 됐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고 하틴에서 십자군을 꺾었다.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소개하다
참파에 짓밟힌 뒤 나라를 되찾고 불교로 방향을 틀었다. 비문에 병원 102곳과 여관 121곳을 지었다고 적었다.
황제권을 세우려 이탈리아 원정을 여섯 번 했고, 십자군 원정 도중 강에서 익사했다. 산속에서 잠자며 독일을 기다린다는 전설이 됐다.
흩어진 초원 부족을 하나로 묶었다. 그가 시작한 정복은 73년간 이어진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전쟁 · 1192 · 인도가 이슬람 왕조를 갖게 된 자리
전해에는 프리트비라지가 이겼다. 이듬해 무함마드 고리가 다시 왔다. 이 한 번으로 북인도가 열렸다. 델리 술탄국이 서고 이후 600년간 이슬람 왕조가 북인도를 다스린다.
【그때 그 자리】 12세기 말이다. 북인도에 라지푸트 왕국들이 갈려 있었다.
가장 강한 것이 델리와 아지메르를 쥔 차우한 왕조였다. 왕이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다.
서북쪽 아프가니스탄에 고르 왕조가 있었다. 무함마드 고리가 인도로 눈을 돌렸다.
【왜 그렇게 됐나】 그전에도 침입은 있었다.
11세기 초 가즈니의 마흐무드가 열일곱 번 쳐들어왔다. 다만 약탈이었다 — 사원의 금을 가져가고 돌아갔다.
고리는 달랐다. 남으려 했다.
【어떻게 흘렀나】 1191년 1차 타라인이다.
라지푸트 연합군이 이겼다. 무함마드 고리가 부상당해 말에서 떨어졌고, 부하가 업고 달아났다.
프리트비라지가 추격하지 않았다. 그것이 뒤에 두고두고 지적된다.
1192년 고리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준비가 달랐다.
기마 궁수를 대량으로 썼다. 무거운 갑옷의 라지푸트 기병과 코끼리를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고, 치고 빠지며 지치게 했다.
새벽에 기습했다. 라지푸트는 아침 의례를 마치고 싸우는 관습이 있었다.
하루 종일 소모시킨 뒤 마지막에 중기병으로 밀었다.
프리트비라지가 잡혀 죽었다.
【그래서】 무함마드 고리가 돌아가면서 노예 출신 장군 쿠트브 웃딘 아이바크를 남겼다.
1206년 고리가 암살되자 아이바크가 델리에서 독립했다. 델리 술탄국의 시작이다.
노예가 세운 왕조라 「노예 왕조(맘루크 왕조)」라 부른다.
그 뒤 320년 동안 다섯 왕조가 이어지고, 1526년 바부르가 와서 무굴 제국이 된다.
【남은 것】 왜 라지푸트가 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여럿이다.
왕국들이 갈려 있어 연합이 느슨했다는 것, 전쟁에 의례적 규범이 남아 있었다는 것, 기병의 질과 전술이 뒤졌다는 것이 거론된다.
말이 컸다. 인도는 좋은 군마를 기르기 어려워 수입에 의존했는데, 그 공급로가 중앙아시아 쪽에 있었다.
쿠트브 웃딘이 델리에 쿠트브 미나르를 세웠다. 높이 73m의 첨탑으로, 지금도 서 있다.
그 옆 모스크가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 27곳을 헐어 그 기둥으로 지어졌다. 기둥에 힌두 문양이 남아 있다.
이 전투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지금 인도 정치와 얽혀 있다. 「1,000년의 노예 상태가 시작된 날」로 보는 서술과, 왕조 교체의 하나로 보는 서술이 부딪힌다.
프리트비라지는 라지푸트 서사시에서 영웅으로 남았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하틴 전투 겐페이 전쟁 몽골의 정복 무신정권의 성립 여몽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