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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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대항해와 인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한반도

조선 전기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전쟁 2건

그라나다 전쟁1482 – 1492
카스티야·아라곤 vs 그라나다

결혼으로 합쳐진 두 왕국이 마지막 이슬람 영토를 노렸다. 새 화포가 산성을 하나씩 열었다.

말라가 1487그라나다 함락 1492

결과781년의 레콘키스타가 끝났다. 같은 해 콜럼버스가 출항했고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다 — 스페인의 세계 제국과 종교적 획일화가 동시에 시작됐다.

10년 · 레콘키스타의 완성
이탈리아 전쟁1494 – 1559
프랑스 vs 합스부르크·스페인

부유하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65년을 다퉜다.

포르노보 1495파비아 1525로마 약탈 1527

결과화약·상비군·용병이 결합한 근대 전쟁의 실험장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혼란 속에서 쓰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전쟁으로 끝났다.

65년 · 근대 전쟁의 시작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13명

아스키아 무함마드정치1493 · 송가이 제국을 넓힌 왕
1443?년 무렵 – 1538

장군으로 손니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다. 메카 순례 뒤 팀북투를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키웠다.

  • 1493년 쿠데타로 아스키아 왕조를 엶
  • 1497년 메카 순례, 학자와 제도를 데려옴
  • 송가이를 서아프리카 역사상 최대 영토로 확장
콜럼버스정치1492 · 제노바 항해사
1451 – 1506

인도로 가는 서쪽 길을 찾다 아메리카에 닿았다.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었다.

  • 1492년 아메리카에 닿음
  • 네 차례 대서양 항해
  •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음
이사벨 1세정치1492 · 에스파냐를 하나로 묶고 콜럼버스를 후원한 여왕
1451 – 1504, 재위 1474 – 1504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해 두 왕국을 합쳤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그해 콜럼버스에게 배 세 척을 내주었다.

  • 페르난도와 결혼, 에스파냐 통합(1469)
  • 그라나다 정복, 레콩키스타 완성(1492)
  • 콜럼버스 항해 후원, 유대인 추방령
다빈치과학1490 · 화가이자 기술자
1452 – 1519

노트 속에 미래를 그린 사람

  • 인체 해부도 제작
  • 비행 기계·전차 설계
  • 모나리자·최후의 만찬
바스쿠 다가마탐험1498 ·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닿은 첫 유럽인
1460 무렵 – 1524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캘리컷에 도착했다. 향료 무역의 길이 바뀌었고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주인이 됐다.

  • 인도 항로 개척, 캘리컷 도착(1498)
  • 제2차 항해에서 무력 통상 강요(1502)
  • 인도 부왕으로 코친에서 사망
구루 나낙사상1499 · 시크교를 창시한 구루
1469 – 1539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신 앞의 평등과 카스트 부정을 설파하며 시크교를 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아홉 명의 구루를 거쳐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로 집대성됐다.

  • 카스트 제도와 우상숭배를 비판
  • 공동 식사(랑가르) 전통을 시작해 신분 평등을 실천
  • 펀자브 지역에서 시크교 공동체의 뿌리를 세움
이스마일 1세정치1501 · 시아파를 국교로 삼아 오늘의 이란을 만든 사파비 왕조의 창건자
1487 – 1524, 재위 1501 – 1524

14세에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가 됐다. 12이맘 시아파를 강제해 수니파 이웃들과 갈라선 페르시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나왔다.

  • 타브리즈 점령, 사파비 왕조 창건(1501)
  • 12이맘 시아파 국교화
  • 찰디란에서 오스만에 패배(1514)
미켈란젤로예술1512 · 다비드와 시스티나 천장을 만든 르네상스의 거장
1475 – 1564

조각가를 자처했으나 교황의 명으로 4년간 천장에 매달려 「천지창조」를 그렸고, 여든 넘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다.

  • 「피에타」(1499), 「다비드」(1504)
  •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512)
  • 「최후의 심판」, 성 베드로 대성당 돔
마키아벨리사상1513 · 「군주론」으로 정치를 도덕에서 떼어 낸 사상가
1469 – 1527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 피렌체 외교관이 실직 후 쓴 얇은 책이 근대 정치학의 출발이 됐다.

  • 피렌체 공화국 서기관, 외교 사절
  • 「군주론」(1513), 「로마사 논고」
  • 국민군 창설 시도
에라스뮈스사상1516 · 「우신예찬」을 쓴 북방 인문주의의 왕자
1466 무렵 – 1536

교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그리스어 신약을 펴냈다. 루터에게 길을 열었지만 분열은 거부했다.

  • 「우신예찬」(1511)
  • 그리스어 신약성서 교정판(1516)
  • 루터와 자유의지 논쟁
루터사상1517 · 수도사
1483 – 1546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인쇄술을 타고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 95개조 반박문 1517
  •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 만인사제설
목테수마 2세정치1519 · 코르테스를 맞은 황제
1466 무렵 – 1520

인구 20만의 도시를 다스렸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에스파냐인을 궁에 들였다가 볼모가 됐고 성난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 테노치티틀란 전성기
  • 코르테스를 손님으로 맞음
  • 죽음의 경위는 기록이 엇갈린다
마젤란탐험1520 ·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돈 항해를 이끈 탐험가
1480 무렵 – 1521

남아메리카 끝의 해협을 찾아 태평양에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에서 전사했으나 남은 배 한 척이 세비야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 마젤란 해협 통과(1520)
  • 태평양 횡단, 필리핀 도착(1521)
  • 엘카노가 지휘한 빅토리아호의 세계일주 완성(1522)

그 무렵의 사건

1492
콜럼버스의 항해
아메리카에 닿았다. 두 대륙의 생태와 인구가 되돌릴 수 없이 뒤섞인다.
두 대륙의 작물·가축·질병이 뒤섞였다. 아메리카 인구는 한 세기 만에 급감한다.
1492
레콩키스타 완성
1492년, 스페인 그라나다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 항복하면서 약 780년에 걸친 이베리아반도 재정복(레콩키스타)이 끝났다.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우마이야 왕조 군대가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정복한 이래, 북부에 남은 기독교 왕국들이 서서히 남쪽으로 영토를 되찾아 나갔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으로 두 왕국을 통합한 뒤 그라나다를 함락하며 재정복을 완성했는데, 같은 해 이들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넜다.
1498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며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바닷길을 처음 열었다.
포르투갈은 엔히크 항해왕자 시절부터 반세기 넘게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로를 조금씩 넓혀왔고,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진입로를 확인한 데 이어 다가마가 마침내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이는 지중해와 중동 상인들이 오랫동안 독점해온 향신료 무역로를 유럽이 직접 뚫어낸 사건으로, 이후 포르투갈은 아시아 해상 무역의 강자로 떠올랐다.
1498
사화의 시대
성종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속에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가 잇따라 일어나며 많은 사림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
성종은 지방 중소 지주 출신의 신진 유학자인 사림을 등용해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온 훈구파를 견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두 세력의 갈등이 반복적으로 폭발했다. 1498년 무오사화는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일이 빌미가 되어 사림이 대거 화를 입은 사건이었다. 1504년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 사건을 문제 삼아 훈구·사림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로 숙청한 사건이다. 1519년 기묘사화에서는 급진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 등 신진 사림이 훈구파의 반격으로 몰락했고, 1545년 을사사화는 왕실 외척 간의 권력 다툼에 사림이 다시 휘말려 희생된 사건이다. 이 네 차례의 사화를 거치며 많은 인재가 희생되었지만, 사림 세력은 지방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해 훗날 조선 정치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1485
경국대전 반포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 이념과 제도를 총망라한 기본 법전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여러 법령을 정비해왔지만, 통일된 기본 법전이 없어 혼선이 있었다. 세조는 이·호·예·병·형·공의 육전 체제로 국가 운영 전반을 규정하는 법전 편찬을 명했고, 이 작업은 예종을 거쳐 성종 16년(1485)에 「경국대전」으로 완성·반포되었다. 이 법전은 관리 임용과 조세, 군사, 형벌, 토지 제도 등 국가 운영의 근간을 명문화해, 이후 조선왕조 500년 통치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후대에도 새 법령은 이 「경국대전」을 보완하는 「속대전」, 「대전통편」 등의 형태로 추가되었을 뿐, 그 틀 자체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1506
중종반정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신하들이 정변을 일으켜 그를 몰아내고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왕으로 세웠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등으로 대규모 숙청을 벌이는 한편, 사냥과 연회를 위해 백성의 삶터를 빼앗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폭정을 거듭했다. 성희안, 박원종 등 훈구 대신들은 더 이상 연산군의 폭정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1506년 군사를 동원, 궁궐을 장악하고 연산군을 폐위시켰다(중종반정). 이들은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했으니, 그가 곧 중종이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이 이후에도 권력을 독점하면서, 중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 등 사림을 등용했고 이는 곧 기묘사화로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교역로 2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이탈리아 전쟁

전쟁 · 1494 · 르네상스가 끝난 65년

부유하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65년을 다퉜다. 화약·상비군·용병이 결합한 근대 전쟁의 실험장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혼란 속에서 쓰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전쟁으로 끝났다.

【그때 그 자리】 1494년이다. 이탈리아에 다섯 세력이 있었다.

밀라노·베네치아·피렌체·교황령·나폴리다.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했다 — 근대 세력 균형의 원형으로 자주 꼽힌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안에서였다.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나폴리를 견제하려 프랑스를 불러들였다.

【왜 그렇게 됐나】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알프스를 넘었다.

3만 명과 함께 왔다. 그 안에 청동제 야포가 있었다.

그때까지 대포는 돌을 쐈고, 옮기는 데 소가 필요했으며, 하루에 몇 발 못 쐈다.

프랑스 포는 청동으로 만들어 가볍고, 쇠구슬을 쐈으며, 말이 끌었다.

중세 성벽이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몇 달을 버티던 성이 하루도 못 갔다.

이탈리아 도시들이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다섯 달 만에 나폴리에 들어갔다.

【어떻게 흘렀나】 그러자 나머지가 뭉쳤다. 베네치아 동맹이 만들어졌고, 에스파냐가 들어왔다.

그때부터 65년이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이탈리아를 전장으로 삼아 싸웠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편을 갈아 가며 살아남으려 했다.

1525년 파비아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사로잡혔다. 에스파냐 총병(아르케부스)이 프랑스 중기병을 무너뜨렸다 — 기사의 시대가 끝났다는 상징으로 인용된다.

1527년 로마 약탈이 최악이었다. 급료를 못 받은 카를 5세의 용병들이 로마로 몰려가 여드레를 약탈했다.

교황이 산탄젤로성으로 피했다. 스위스 근위대 189명 가운데 147명이 죽으며 시간을 벌었다 — 지금도 교황청 근위대가 스위스인인 이유다.

【그래서】 성이 달라졌다.

높은 벽이 소용없어지자, 낮고 두껍게 쌓고 별 모양으로 각을 냈다. 「트라체 이탈리아나(이탈리아식 축성)」다.

각진 능보에서 옆으로 사격해 접근하는 적을 쓸었다. 이 방식이 유럽 전체로 퍼졌다.

군대도 커졌다. 성을 포위하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세금과 관료가 필요했다.

「군사 혁명」이 근대 국가를 만들었다는 논의가 여기서 나온다.

【남은 것】 이탈리아가 통일을 400년 미뤘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끝났다. 에스파냐가 이탈리아 대부분을 쥐었다.

마키아벨리가 이 전쟁을 보며 「군주론」을 썼다. 용병에 의존하는 이탈리아를 비판하고 자국군을 주장했다.

「이탈리아가 노예 상태에 있고 (…) 지도자를 기다린다」는 마지막 장이 이 상황에서 나왔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했다. 다빈치는 군사 기술자로도 고용됐다.

르네상스의 절정과 이탈리아의 몰락이 같은 시기다.

지도에서 보기: 1492년의 세계 · 같은 시대: 그라나다 전쟁 찰디란 전투 아즈텍 정복 오닌의 난 테노치티틀란 함락 파니파트 1차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