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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히타이트·이집트 신왕국·바빌로니아가 사신과 군대를 주고받았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100년의 이민족 지배를 끝내려 상이집트의 테베가 일어섰다. 힉소스가 들여온 전차를 그대로 배워서 썼다.
결과아흐모세 1세가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신왕국을 열었다. 이후 이집트는 방어가 아니라 선제 공격을 국방으로 삼는다.
왜힉소스를 몰아낸 이집트가 국경을 시리아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완충지대를 만들어 두 번 다시 침입당하지 않겠다는 발상이었다.
결과투트모세 3세가 17차례 원정해 이집트 최대 판도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두 나라가 공주를 주고받는 동맹으로 돌아섰다.
해당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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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 BC 1500 · 적이 사돈이 되기까지
힉소스를 몰아낸 이집트가 국경을 시리아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완충지대를 만들어 두 번 다시 침입당하지 않겠다는 발상이었다. 투트모세 3세가 17차례 원정해 이집트 최대 판도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두 나라가 공주를 주고받는 동맹으로 돌아섰다.
【그때 그 자리】 BC 16~14세기다. 시리아를 두고 두 세력이 부딪쳤다.
남쪽에서 이집트 신왕국이 올라왔다. 힉소스를 몰아낸 뒤 미리 나가서 친다는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북쪽에 미탄니가 있었다. 후르리인의 나라로, 지금의 시리아 북부와 이라크 북부에 걸쳐 있었다.
미탄니의 지배층은 인도유럽계 이름을 썼고, 말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왜 그렇게 됐나】 시리아는 길목이다. 지중해 항구와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가 만나는 자리다.
그리고 그곳의 작은 도시국가들이 어느 편에 붙느냐로 판이 바뀌었다.
투트모세 3세가 열일곱 번 원정했다.
BC 1457년 므깃도에서 시리아 연합군을 깼다. 좁고 위험한 길을 골라 넘어 기습한 것으로 유명하다 — 장군들이 반대했으나 밀어붙였다.
이 전투가 이름과 전술이 함께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투로 자주 꼽힌다.
「므깃도」의 히브리식 이름이 「하르 므깃도」이고,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아마겟돈」이 된다. 전쟁이 반복된 자리라는 기억이 남은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투트모세 3세가 유프라테스를 건너 미탄니 영토에 들어갔다.
배를 육로로 실어 가 강을 건넜다. 그리고 승전비를 세웠다 — 할아버지가 세운 비석 옆에 자기 것을 세웠다.
그래도 미탄니를 없애지는 못했다. 이집트가 물러나면 다시 회복됐다.
그러다 판이 바뀌었다. 북쪽에서 히타이트가 커졌고, 동쪽에서 아시리아가 일어섰다.
미탄니가 두 방향에서 눌렸다.
【그래서】 이집트와 미탄니가 손을 잡았다.
적이던 두 나라가 혼인 동맹을 맺었다. 미탄니의 공주들이 이집트 왕가로 시집갔다.
「아마르나 문서」에 그 편지들이 남아 있다. 왕들이 서로 「형제여」라 부르며 금과 선물의 양을 두고 흥정한다.
한 미탄니 왕이 이렇게 썼다. 「내 형제의 나라에는 금이 흙처럼 많다지요.」
【남은 것】 미탄니는 결국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에게 나뉘어 사라졌다. 수도 와슈칸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 시기가 「청동기 국제 체제」의 전성기다. 이집트·히타이트·미탄니·바빌로니아·아시리아가 서로 사절과 선물과 신부를 주고받았다.
외교 문서를 아카드어로 썼다.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닌 언어가 국제어였다.
그 체제가 BC 1200년 무렵 한꺼번에 무너진다.
지도에서 보기: BC 1500년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