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연합군 일본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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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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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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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몽골의 세기

유라시아 대부분이 한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역참으로 동서가 이어져 사람과 물자와 역병이 함께 흘렀다.

한반도

원 간섭기

몽골과 강화한 뒤 원의 부마국이 됐다.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조는 이미 기울었다.

전쟁 2건

몽골의 정복1206 – 1279
몽골 제국 vs 금·호라즘·러시아 제후국·아바스·남송

부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에게 유목 연합체를 유지할 전리품과 목초지가 필요했다. 호라즘이 사신단을 처형한 것이 서방 원정의 방아쇠가 됐다.

호라즘 1219–1221칼카강 1223레그니차 1241바그다드 1258애산 1279

결과73년에 걸쳐 태평양에서 동유럽까지 이어지는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이 만들어졌다.

73년 ·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이 만들어졌다
여몽연합군 일본원정1274 – 1281
원·고려 연합 vs 가마쿠라 막부

쿠빌라이가 일본에 조공을 요구했으나 가마쿠라 막부가 거부했다. 고려는 함선과 병력을 대야 했다.

분에이 1274고안 1281

결과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궤멸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풍'이라 불렀다.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5명

마르코 폴로탐험1275 · 쿠빌라이의 궁정을 유럽에 알린 베네치아 상인
1254 – 1324

17년을 원나라에서 보내고 돌아와 감옥에서 구술한 「동방견문록」이 콜럼버스를 바다로 이끌었다.

  • 실크로드를 거쳐 원 대도 도착(1275)
  • 쿠빌라이 칸 아래서 17년 체류
  • 「동방견문록」 구술(1298)
쿠빌라이 칸정치1271 · 원 세조
1215 – 1294

국호를 대원으로 정하고 남송을 무너뜨렸다. 중국 전역이 처음으로 유목 왕조 아래 들어갔다.

  • 국호를 대원으로 1271
  • 남송을 무너뜨림 1279
  • 대도(오늘의 베이징) 건설
토마스 아퀴나스사상1270 · 신앙과 이성을 하나로 엮은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
1225 – 1274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 안으로 들여왔다. 「신학대전」은 가톨릭 신학의 기둥이 됐다.

  • 「신학대전」「대이교도대전」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독교적 수용
  • 신 존재의 다섯 가지 길
쩐흥다오장군1288 · 몽골을 세 번 막은 장수
1228 무렵 – 1300

대월의 장수로 몽골의 세 차례 침입을 막았다. 1288년 바익당강 바닥에 쇠말뚝을 박아 두고 썰물에 함대를 걸리게 했다.

  • 바익당강 — 강바닥 말뚝
  • 몽골 침입 3회 격퇴
  • 격장사 — 병사에게 부친 글
오스만 1세정치1299 · 오스만 제국의 이름이 된 초대 군주
1258 – 1326 무렵, 재위 1299 – 1326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작은 튀르크계 공국을 세워 비잔티움 국경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의 이름을 딴 오스만 왕조는 이후 600년 넘게 이어지며 세 대륙에 걸친 제국으로 성장했다.

  • 1299년 독립 공국 선포로 오스만 왕조 시작
  • 비잔티움 변경에서 성전(가지) 전사로 명성을 쌓음
  • 아들 오르한 때 부르사를 수도로 삼음

그 무렵의 사건

1280
폴리네시아의 항해
나침반 없이 태평양을 건넜다.
별의 위치, 물결이 섬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결,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읽었다. 하와이에서 뉴질랜드까지 태평양 전역에 같은 계통의 사람들이 퍼졌다. 유럽이 대양으로 나가기 수백 년 전이다.
1291
스위스 연방 성립
1291년, 알프스 산속 세 계곡 공동체(우리·슈비츠·운터발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맞서 서로 돕기로 서약하며 스위스 연방의 첫 씨앗을 뿌렸다.
이후 여러 산악 공동체와 도시들이 하나둘 이 동맹에 합류하며 서서히 몸집을 키웠고, 지형적 이점을 살린 저항으로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지켜냈다. 오랜 중립 전통은 이후 국제 외교와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1251
팔만대장경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길 기원하며 16년에 걸쳐 8만 장이 넘는 목판에 불경 전체를 새긴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
거란의 침입 때도 대장경을 만들어 위기를 넘긴 전례가 있었는데, 그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에 항전하던 고려 조정은, 온 나라의 정성을 모아 부처의 가피를 구한다는 뜻에서 다시 대장경 조판 사업을 벌였다. 8만여 장에 이르는 목판에 새긴 5천만 자가 넘는 글자는 오탈자가 거의 없을 만큼 정교해,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 판본 중 하나로 꼽히며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다.
1300
짐바브웨의 번성과 쇠퇴
모르타르 없이 돌만 쌓아 사하라 이남 최대의 석조 도시를 세웠다.
쇼나족이 세운 도시로, 중국 도자기와 페르시아 유리구슬이 나올 만큼 먼 곳과 교역했다. 20세기 초 백인 식민 당국은 「아프리카인이 이런 걸 지었을 리 없다」며 페니키아인이나 아랍인의 것이라 주장했다 — 1929년 고고학자 캐턴톰프슨의 발굴로 완전한 아프리카 기원임이 확인됐다. 왜 1450년 무렵 버려졌는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 교역로가 해안으로 옮겨갔다는 설, 삼림 파괴와 지력 소진이라는 설, 소빙하기 가뭄이라는 설이 나란히 있다.
1234
금속활자
고려가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찍었다.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이르다.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이르다. 다만 한자 문화권에서는 인쇄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1324
말리 제국의 전성기
14세기, 서아프리카의 말리 제국은 황금과 소금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황제 만사 무사가 1324년 메카 순례길에 어마어마한 금을 뿌리듯 쓴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개인의 사례로 회자된다. 그가 지나간 카이로 등지에서는 이 대량의 금 유입으로 물가가 한동안 폭등했을 정도였다. 제국의 중심지 팀북투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도 이름을 떨쳐, 서아프리카 곳곳에서 학자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내부 계승 다툼과 외부 세력의 압박으로 15~16세기에 걸쳐 서서히 쇠퇴했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여몽연합군 일본원정

전쟁 · 1274 · 원·고려 연합 vs 가마쿠라 막부

쿠빌라이가 일본에 조공을 요구했으나 가마쿠라 막부가 거부했다. 고려는 함선과 병력을 대야 했다.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궤멸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풍'이라 불렀다.

【그때 그 자리】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했다. 30년 전쟁이 끝났다.

1271년 쿠빌라이가 국호를 원으로 정하고 1279년 남송을 없앴다. 동아시아 대부분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남은 것이 일본이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 호조 도키무네는 답하지 않았다. 사신을 처형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됐나】

원정의 이유로 몇 가지가 꼽힌다.

일본이 남송과 교역하고 있어 남송을 고립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쿠빌라이 자신의 정통성 문제도 있었다.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서 정복 실적이 필요했다.

고려에게는 재앙이었다. 배를 만들고 군량을 대고 병사를 내야 했다. 30년 전쟁으로 이미 국토가 황폐한 상태였다.

【어떻게 흘렀나】

1274년 1차 원정. 몽골과 한족 병력 2만 5천에 고려군 8천, 배 900척이었다.

쓰시마와 이키를 점령하고 하카타만에 상륙했다. 일본 무사들은 일대일로 이름을 대고 싸우는 방식에 익숙했는데, 몽골군은 집단 전술과 화약 무기를 썼다. 철포라 불린 폭발물이 쓰였다.

첫날 일본군이 밀렸다. 그런데 그날 밤 연합군이 배로 돌아갔고, 폭풍우가 몰아쳐 함대가 크게 부서졌다.

1281년 2차 원정. 규모가 훨씬 컸다. 고려에서 출발한 동로군 4만과 남송 지역에서 출발한 강남군 10만이다. 배가 4천 척이 넘었다.

이번에는 일본이 준비돼 있었다. 하카타만 해안에 20킬로미터의 석축 방벽을 쌓아 두었다. 상륙이 막혔다.

두 함대의 합류도 늦어졌다. 배에서 두 달 가까이 지내며 역병이 돌았다.

8월 태풍이 왔다. 함대가 궤멸했다. 1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붙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일본은 이를 신의 바람, 가미카제라 불렀다. 신이 나라를 지킨다는 관념이 여기서 굳었다.

이 관념이 20세기에 다시 불려 나왔다. 태평양전쟁 말기 자살 공격 부대의 이름이 됐다.

승리했지만 막부는 흔들렸다. 방어 전쟁이라 나눠 줄 전리품이 없었다. 목숨 걸고 싸운 무사들에게 보상하지 못했다. 이 불만이 쌓여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다.

【남은 것】

고려의 피해가 컸다. 두 차례 원정에 배와 군량과 병력을 대느라 국력이 소모됐다. 제주도에 목마장이 설치돼 말을 길렀다.

침몰선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다카시마 해저에서 원의 함선과 유물이 나왔다. 배 일부가 하천용 평저선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급히 만드느라 바다에 맞지 않는 배가 섞였다는 것이다. 고려사에도 무리한 조선 명령에 대한 기록이 있다.

태풍만이 원인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준비 부족과 지휘 분열과 방벽이 함께 작용했다.

신이 지켜 준다는 이야기가 700년 뒤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면, 한 사건을 무엇으로 기억하느냐가 얼마나 멀리 가는지 알 수 있다.

지도에서 보기: 12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바익당강 전투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키예프 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