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노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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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전제군주정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넷으로 나눠 통치했고 콘스탄티누스가 다시 합쳤다. 수도가 동쪽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가고, 박해받던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간다.

한반도

삼국의 각축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전쟁 1건

아드리아노플 전투376 – 378
동로마 vs 서고트

훈족에 밀린 고트족이 도나우를 건너게 해달라 청했고 로마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관리들이 식량을 착취하자 굶주린 고트족이 봉기했다.

아드리아노플 378

결과황제 발렌스가 전사했다. 게르만 이동이 걷잡을 수 없어졌다.

하루 · 로마군 3분의 2가 죽고 황제 발렌스도 전사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6명

근초고왕정치371 · 백제 13대 왕
? – 375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열었다. 평양성을 쳐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바다 건너 왜와 통했다.

  • 371년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 칠지도를 왜에 보냄
  •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
율리아누스정치361 · 시계를 되돌리려 한 황제
AD 331 – AD 363

기독교 황실에서 자랐으나 그리스 철학에 빠져 옛 신들로 돌아가려 했다. 2년 만에 페르시아 원정 중 창에 찔려 죽었다.

  • 이교 부흥 시도 — 실패로 끝남
  • 기독교인의 교직을 금함
  • 마지막 말 「갈릴리인이여, 그대가 이겼다」는 후대의 각색
테오도시우스정치392 ·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제국을 마지막으로 통일한 황제
347 – 395, 재위 379 – 395

이교 제의를 금지하고 니케아 신조를 강제했다. 죽으며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눴고, 동서 로마는 다시 합쳐지지 않았다.

  • 기독교 국교화(테살로니카 칙령 380)
  • 올림피아 제전 등 이교 제의 금지
  • 사후 동서 로마 영구 분리(395)
광개토대왕정치396 · 고구려 19대 왕
374 – 412

열여덟에 즉위해 요동과 만주 동부, 한강 이북을 확보했다. 아버지 왕이 전사한 나라를 물려받아 스무 해 만에 뒤집었다.

  • 396년 백제 58성 700촌 확보
  • 400년 신라를 구원하고 금관가야까지 남하
  • 410년 동부여 복속
  • 광개토왕릉비 1,775자가 남았다
아우구스티누스사상400 · 자기 잘못을 책으로 쓴 사람
AD 354 – AD 430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방탕했던 젊은 시절을 「고백록」에 그대로 적었다 — 서양 최초의 자서전이다.

  • 「고백록」 — 내면을 들여다본 첫 글
  • 「신국론」 — 로마 약탈 이후의 해답
  • 원죄와 은총 — 서방 신학의 뼈대
찬드라굽타 2세정치400 · 굽타의 절정
375 – 415 재위

인도의 고전기라 불리는 시대다. 이때 영이 수학 기호로 쓰이고 십진법이 정리됐다. 칼리다사가 시를 쓰고 나란다에 대학이 섰다.

  • 굽타 전성기
  • 영과 십진법이 자리 잡음
  • 중국 승려 법현이 와서 기록을 남김

그 무렵의 사건

372
고구려 불교 수용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웠다.
왕권 강화의 이념이 들어왔다. 백제·신라가 뒤이어 받아들인다.
372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고구려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며 태학을 세워,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인 국가 체제를 갖췄다.
직전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는 위기를 겪은 뒤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372년 중국 전진에서 불교를 들여와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국가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인재를 길렀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 체계인 율령을 반포해 왕권 아래 통치 질서를 확립했다. 이 정비를 바탕으로 다음 대인 광개토대왕·장수왕 때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410
로마 약탈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800년 만에 로마를 점령해 사흘 동안 약탈했다.
발칸에서 굶주리던 서고트족은 이탈리아로 내려와 세 차례 로마를 포위했고, 8월 24일 밤 살라리아 문이 열렸다. 대규모 학살은 없었지만 「영원한 도시」가 무너졌다는 충격은 제국 전체를 흔들었다. 히에로니무스는 베들레헴에서 「온 세계를 사로잡은 도시가 사로잡혔다」고 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건에 답하려 「신국론」을 썼다.
330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 도시는 1123년을 더 버틴다.
제국의 무게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 도시는 1,123년을 더 버틴다.
325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한 첫 세계 공의회. 예수가 신과 「동일 본질」이라는 신조가 정해졌다.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낮다고 했고 알렉산드리아 주교들은 반대했다. 황제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 300여 명의 주교를 니케아에 모아 결론을 강요했다. 여기서 나온 니케아 신조는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가 외우고, 부활절 날짜도 이때 정해졌다. 종교 문제를 황제가 결정하는 선례가 함께 생겼다.
427
나란다 대학
승려 1만 명이 배우던 곳. 도서관이 몇 달을 탔다.
교사 2천 명과 학생 1만 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티베트·한국·동남아시아에서 유학이 왔다. 신라의 혜초도 인도를 다녀와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1197년 침입으로 불탔고 도서관이 몇 달을 탔다고 전한다.

교역로 4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인도양 계절풍 항로BC 100 – 700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오간 것로마의 금화가 인도로 흘러가고 후추가 로마로 왔다. 로마 원로원이 금 유출을 걱정할 정도였다.
거점미오스호르모스 · 아덴 · 소코트라 · 무지리스

아드리아노플 전투

전쟁 · 376 · 동로마 vs 서고트

훈족에 밀린 고트족이 도나우를 건너게 해달라 청했고 로마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관리들이 식량을 착취하자 굶주린 고트족이 봉기했다. 황제 발렌스가 전사했다. 게르만 이동이 걷잡을 수 없어졌다.

【그때 그 자리】

4세기 후반 로마는 동서로 나뉘어 다스려지고 있었다. 서쪽은 그라티아누스, 동쪽은 발렌스였다.

동쪽에서 새로운 힘이 밀려왔다. 훈족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만나는 부족을 밀어냈다.

밀린 부족이 다시 다른 부족을 밀었다. 이 연쇄가 게르만 민족 대이동이다.

376년 서고트족이 다뉴브강 북안에 이르렀다. 그들은 무기를 내려놓을 테니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청했다.

【왜 그렇게 됐나】

발렌스가 허락했다. 계산이 있었다. 이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군대에 보충하면 국경 방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로마는 오래전부터 이민족을 받아들여 군인으로 썼다.

문제는 실행이었다.

강을 건넌 사람이 수만 명인데 식량 공급이 되지 않았다. 현지 로마 관리들이 이 상황을 이용했다. 곡물을 빼돌리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개고기 한 마리에 아이 한 명을 노예로 팔게 했다는 기록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게 남아 있다.

참다못한 서고트족이 무장했다. 무기를 내놓기로 했으나 뇌물로 상당수를 숨긴 상태였다.

【어떻게 흘렀나】

2년간 발칸에서 싸움이 이어졌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가 아드리아노플, 지금의 튀르키예 에디르네 부근에서 결전에 나섰다.

그는 서쪽의 그라티아누스가 원군을 이끌고 오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지 않았다. 정찰이 적의 수를 실제보다 적게 보고했고, 공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는 해석이 있다.

한여름 뙤약볕에 로마군이 행군해 도착했다. 서고트족은 수레로 진을 치고 기다렸다. 협상이 오가는 사이 로마군은 갈증에 지쳤다.

그때 밖에 나가 있던 서고트 기병대가 돌아와 로마군의 측면을 쳤다. 대열이 무너졌다.

동로마군 3분의 2가 죽었다. 황제 발렌스도 죽었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부상당해 옮겨진 농가가 불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암미아누스는 칸나에 이후 로마가 겪은 가장 큰 패배라고 적었다.

【그래서】

382년 테오도시우스가 서고트족과 조약을 맺었다. 그들은 제국 안에 정착하되 로마 시민이 되지 않고 자기 지도자 아래 자치를 유지하며, 필요할 때 군대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것이 전례가 됐다. 이후 여러 게르만 집단이 같은 조건으로 제국 안에 들어왔다. 제국 안에 제국이 통제하지 못하는 무장 집단이 생긴 것이다.

410년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한다.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를 폐위한다.

【남은 것】

오랫동안 이 전투가 기병의 시대를 열었다고 서술됐다. 중장기병이 보병 군단을 이겼으니 중세 기사의 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해석이 과장으로 본다. 서고트 기병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지만 그 자체가 새로운 전술은 아니었다. 로마의 패인은 정찰 실패와 지휘관의 조급함과 병사의 탈진이 겹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앞의 일이다.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해 놓고 먹일 준비를 하지 않았고, 현장 관리들이 그 상황에서 착취했다. 전투는 그 결과였다.

이 대목이 지금도 자주 인용된다.

지도에서 보기: 3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광개토대왕의 정복 4세기 로마-사산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