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케르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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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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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지질시대

기후

조산운동

생물과 공룡

대멸종

인류의 이동

그 해의 정치

봉건 유럽과 십자군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반도

고려 전기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전쟁 1건

만지케르트 전투1071
셀주크 vs 동로마

셀주크 튀르크가 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오자 동로마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섰다.

만지케르트 1071

결과황제가 사로잡히고 아나톨리아를 잃었다. 이 패배가 십자군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하루 · 황제 로마노스 4세가 포로가 됐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5명

왕안석정치1069 · 송을 뜯어고치려 한 재상
AD 1021 – AD 1086

재정난과 군사력 약화를 제도로 풀려 했다. 개혁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그가 물러나자 대부분 폐지됐다.

  • 청묘법 —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빌려줌
  • 모역법·보갑법 등 신법 시행
  • 구법당과의 당쟁이 송을 갈랐다
정복왕 윌리엄장군1066 · 하루 만에 나라를 바꾼 사람
AD 1028 – AD 1087

노르망디 공의 사생아로 태어나 잉글랜드 왕이 됐다. 헤이스팅스 한 번의 전투가 잉글랜드의 지배층과 언어를 통째로 갈았다.

  • 헤이스팅스 전투 1066
  • 둠즈데이 북 — 전국 토지를 조사
  • 잉글랜드에 노르만 봉건제를 이식
소식예술1080 · 귀양지에서 더 좋은 글을 쓴 사람
AD 1037 – AD 1101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 「적벽부」 — 유배지에서 쓴 절정
  • 송대 문인화의 기틀
  • 동파육 — 유배지의 요리가 이름을 남김
심괄과학1088 · 송의 과학자
1031 – 1095

몽계필담을 쓴 박학한 관료

  • 몽계필담 저술
  • 자기 편각을 처음 기록
  • 활자 인쇄술 관련 기록을 남김
우르바노 2세사상1095 · 한 번의 연설로 200년을 움직인 교황
AD 1035 – AD 1099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이 군중에서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 클레르몽 연설 1095 — 십자군의 시작
  • 동서 교회 화해를 노렸으나 골만 깊어짐
  •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사망

그 무렵의 사건

1077
카노사의 굴욕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눈 속에서 사흘을 맨발로 서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죄했다.
주교를 누가 임명하느냐는 서임권 다툼에서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고, 제후들이 황제를 버리려 하자 하인리히는 알프스를 넘어 카노사 성 앞에 섰다. 교황은 용서했지만 황제는 곧 힘을 회복해 로마로 쳐들어갔다. 이 사건은 교권이 왕권 위에 선 상징이자, 세속 권력과 교회가 갈라지는 서유럽 특유의 이중 구조를 굳힌 장면이다.
1054
동서 교회 분열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했다.
1,000년을 함께한 교회가 갈라졌다. 지금까지 봉합되지 않았다.
1050
카호키아
미시시피강 가에 인구 2만의 도시가 있었다.
북아메리카에 유럽인이 오기 전 가장 큰 도시였다. 밑변이 기자 대피라미드보다 넓은 흙 둔덕을 쌓았고, 나무 기둥을 원으로 세워 해를 관측했다. 13세기에 버려졌는데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1107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국경을 위협하자, 윤관은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해 이들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여진족과의 첫 전투에서 고려의 기존 군대가 기병 중심인 여진족에 고전하자, 윤관은 기병·보병·승병을 아우르는 특수 부대 별무반을 조직해 재정비했다. 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낸 뒤, 그 자리에 9개의 성(동북 9성)을 쌓아 새 영토로 편입했다(1107년). 그러나 이 지역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과 여진의 거센 반환 요구 등을 고려해, 고려는 몇 년 뒤 이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했다.
1030
촐라 왕조의 해상 원정
11세기, 남인도의 촐라 왕조가 벵골만을 건너 동남아시아의 스리위자야 왕국까지 해군을 보내 정복했다.
라자라자 1세와 그 아들 라젠드라 1세 시절 촐라는 인도양 해상무역로를 장악하는 강력한 해군력을 갖췄다. 동남아까지 원정을 보낸 것은 고대 인도 왕조로서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1113
앙코르의 물길
사람이 판 저수지 하나가 길이 8킬로미터였다.
우기에 넘치고 건기에 마르는 땅을 저수지와 수로로 다스렸다. 1년에 두세 번 벼를 거뒀고 그 잉여가 사원을 지었다. 도시 면적이 1,000제곱킬로미터로 산업화 이전 세계 최대였다는 평가가 있다. 15세기에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오며 그 수로가 무너졌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만지케르트 전투

전쟁 · 1071 · 셀주크 vs 동로마

셀주크 튀르크가 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오자 동로마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섰다. 황제가 사로잡히고 아나톨리아를 잃었다. 이 패배가 십자군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그때 그 자리】

11세기 중반 비잔티움은 오랜만에 안정돼 보였다. 바실리오스 2세가 1025년까지 다스리며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영토를 넓혔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후계 다툼과 궁정 정치로 50년이 흘렀다. 특히 지방의 자유농민 병사를 기반으로 한 테마 제도가 무너졌다. 대귀족이 농민의 땅을 사들이면서 병력을 낼 사람이 줄었다. 대신 용병을 썼다.

동쪽에서 셀주크 튀르크가 왔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해 온 유목 세력으로, 1055년 바그다드에 들어가 아바스 칼리프에게서 술탄 칭호를 받았다.

【왜 그렇게 됐나】

1068년 로마노스 4세가 황제가 됐다. 군인 출신으로, 동쪽 국경의 약탈을 끝내겠다며 원정에 나섰다.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원래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치려던 참이었다. 비잔티움과 큰 싸움을 벌일 뜻이 없었다.

두 사람 다 이 전투를 계획하지 않았다.

【어떻게 흘렀나】

1071년 8월 26일 지금의 튀르키예 동부 만지케르트 부근에서 마주쳤다.

비잔티움군은 혼성이었다.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노르만과 페체네그와 우즈 용병이 섞여 있었다. 지휘 계통이 하나가 아니었다.

셀주크는 유목민 전술을 썼다.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활을 쏘며 물러나다 추격해 오면 흩어지고 다시 모여 옆을 쳤다.

로마노스가 하루 종일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다. 해가 지자 회군 명령을 내렸다.

이때 후위를 맡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명령을 잘못 전했거나 일부러 어겼다. 그는 황제의 정적인 두카스 가문 사람이었다. 후위가 그대로 전장을 떠났다.

앞의 군대가 고립됐다. 용병들도 달아났다. 황제가 사로잡혔다.

알프 아르슬란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예를 갖춰 대접하고 배상금과 조약을 조건으로 풀어줬다.

【그래서】

돌아온 로마노스를 기다린 것은 반역이었다. 두카스 가문이 이미 새 황제를 세웠다. 그는 폐위되고 눈이 뽑혀 죽었다.

이후 비잔티움에서 내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내전에서 각 진영이 셀주크 용병을 불러들였다.

아나톨리아가 그렇게 열렸다. 전투에서 잃은 것이 아니라 그 뒤 10년의 내전에서 잃었다.

아나톨리아는 비잔티움 병력과 세수의 주요 공급지였다. 이 땅을 잃자 제국의 몸이 반으로 줄었다.

【남은 것】

1095년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방에 용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그것을 성지 탈환 원정으로 바꿔 선포했다. 십자군이 여기서 시작된다.

즉 만지케르트가 없었다면 십자군도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 길게 보면 이 전투가 오늘의 튀르키예를 만들었다. 그전까지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어를 쓰는 기독교 지역이었다. 이후 튀르크계 인구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언어와 종교가 바뀌었다. 지금 튀르키예 공화국은 이 전투를 나라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기린다.

패인은 적의 강함보다 안의 분열이었다. 후위 지휘관이 정치적 이유로 전장을 떠난 것, 용병이 달아난 것, 그리고 돌아온 황제를 자기편이 죽인 것이다.

지도에서 보기: 10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노르만 정복 제1차 십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