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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베르사유 체제가 패전국에 가혹했고 대공황이 겹쳤다. 의회 민주주의가 무너진 자리에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들어섰다.
국권을 잃고 35년. 3·1운동과 임시정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왜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오스만 제국이 연합국에 분할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무스타파 케말이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
결과특히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지켜냈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는 방정식을 세우고, 양자역학의 역설을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짚었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원리를 내놨다.
우연히 자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은하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측으로 밝혀 팽창 우주를 증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뒤, 튀르크 독립전쟁을 이끌어 그리스와 연합국의 분할 시도를 막아냈다. 1923년 술탄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다.
소금 행진으로 비폭력 불복종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뒤,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을 앞세운 폭압적 통치를 이어갔다. 아이티계 주민 수천~수만 명을 학살한 1937년 '파슬리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첫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나중엔 그의 꼭두각시가 됐고,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거꾸로 매달렸다.
스물넷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한 번으로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한 것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과 도시국가를 정복·통합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왕이 됐다.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독립군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 암살당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열일곱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졌다.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군을 조직했다.
민족자결을 말해 3·1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정작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무솔리니의 침공에 맞서 제네바에서 「오늘은 우리, 내일은 당신들」이라 경고했다. 44년을 다스렸고 라스타파리는 그를 신으로 섬긴다.
불황엔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 그의 「일반이론」은 전후 30년 서방 경제정책의 교과서였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했다.
북벌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일본과 공산당 사이에서 싸우다 1949년 대륙을 잃었다. 타이완에서 계엄으로 26년을 다스렸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회화를 깨뜨렸고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상을 고발했다. 91년 동안 5만 점을 만들었다.
당장 싸우는 것보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봤다. 미국에서 동포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웠다.
전자가 정해진 궤도만 돈다는 원자모형으로 양자역학의 문을 열었다.
1936년 공화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3년간의 내전 끝에 승리했다. 1975년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권위주의 체제로 통치했다.
모델 T를 조립라인에서 93분에 한 대씩 만들어 값을 세 배 낮췄다. 노동자에게 하루 5달러를 주어 자기 차를 사게 했다.
빈의 낙방 화가에서 독일 총통이 됐다.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으며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도 항복을 거부했다. 라디오 연설로 국민을 버티게 했다.
대륙이 움직인다고 말한 사람
삼민주의를 내걸고 열 번 봉기해 열 번 실패했지만 신해혁명으로 2천 년 제정을 끝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그를 국부로 받든다.
대공황을 뉴딜로 넘기고 전쟁으로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만주 명동촌에서 나 일본에서 옥사했다. 스물일곱이었다. 시집은 죽은 뒤에 나왔다.
남부 농민들을 이끌고 빼앗긴 공유지를 되찾으려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약속은 미뤄졌고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매복에 걸려 죽었다.
원자핵을 발견하다
최초의 원자로를 가동하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재판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숙청으로 권력을 굳히고 독소전쟁을 이겼다. 전후 동유럽을 진영에 편입시켰다.
봄브라는 장치로 독일군 암호를 풀어냈다. 컴퓨터 이론의 기초를 놓았지만 박해 속에 세상을 떠났다.
역사는 나와 남의 싸움이라고 썼다. 을지문덕전을 써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 자체가 힘이 된다고 봤다.
1944년 6월 6일 「출발」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으로는 한국전쟁을 끝내고 고속도로를 깔았으며 「군산복합체」를 경고했다.
파리에서 요리사로, 뉴욕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30년을 밖에서 지냈다. 1945년 독립선언문 첫머리에 미국 독립선언을 인용했다.
프로그램을 메모리에 저장하는 구조를 제시해 현대 컴퓨터의 틀을 잡았다.
일본 항복 이틀 뒤 자카르타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4년의 무력·외교전 끝에 네덜란드의 승인을 받아냈으나, 1965년 이후 수하르토에게 밀려났다.
그의 이름으로 중국과 태평양의 전쟁이 벌어졌다. 원폭 뒤 항복을 방송했고, 전범 재판을 피해 「상징」으로 남아 1989년까지 재위했다.
루스벨트가 급사해 82일 만에 대통령이 됐고 원폭 사용을 결정했다. 마셜 플랜과 나토, 한국전쟁 참전으로 냉전의 틀을 짰다.
로스앨러모스에서 3년 만에 폭탄을 만들었고, 첫 폭발을 보며 「나는 죽음이 되었다」를 떠올렸다. 수소폭탄에 반대하다 보안 청문회로 몰락했다.
노동자 계층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올라 산업화와 사회복지 확대를 추진했다. 부인 에바 페론('에비타')과 함께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넉 달 사이 논문 네 편으로 물리학을 바꿨다. 1919년 일식 관측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일본 점령기와 그 이후 영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7년 영국과 독립 협정을 맺어냈으나, 같은 해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돼 독립(1948)을 직접 보지 못했다.
「자정의 종이 울릴 때 인도는 자유로 깨어난다」. 17년간 총리로 세속주의·사회주의·비동맹의 인도를 세웠다.
힌두-무슬림 통합의 대사였던 변호사가 두 민족론으로 돌아섰다. 파키스탄 건국 1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정보이론을 세우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장기 집권을 시도하다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파르티잔으로 나치를 몰아내고 소련 진영에서 이탈했다. 비동맹 운동을 이끌고 여섯 민족을 하나로 묶었으나 그가 죽자 나라도 갈라졌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아랍 5개국의 공격을 막아 냈다. 사막 키부츠에서 여생을 보냈다.
국공내전에서 이기고 톈안먼에서 건국을 선포했다.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 모래언덕에서 12초, 36m. 자전거 가게를 하던 두 형제가 하늘을 열었다.
인천에 상륙해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확전 문제로 해임됐다.
불가촉천민으로 나 미국과 영국에서 박사가 됐다. 독립 인도의 헌법 초안을 썼고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금지 조항으로 넣었다. 간디와 이 문제로 정면으로 부딪쳤다.
만주 항일 유격대 출신으로 소련의 후원 아래 정권을 세웠다. 남침으로 300만이 죽는 전쟁을 일으켰고 3대 세습 체제의 시조가 됐다.
흑체복사 문제를 풀려고 에너지가 최소 단위로만 오간다고 가정했다. 그렇게 양자역학이 시작됐다.
51번 사진을 찍은 사람
꿈은 억압된 소원의 실현이고 사람은 스스로 모르는 힘에 이끌린다. 그의 이론은 심리학과 문학, 일상의 말까지 바꿨다.
해당 없음
인물 · 1926 ·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그때 그 자리】 1879년 충남 홍성에서 났다.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에 관계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했다. 1908년 일본에 건너가 근대 불교를 보고 왔다.
【왜 그렇게 됐나】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냈다.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고, 산속에서 도시로 나오고, 미신적 의식을 없애자 했다.
당시 불교계에 충격이었다. 그는 종교가 세상에서 물러나 있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1919년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했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그가 썼다는 것이 통설이다 —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어떻게 흘렀나】 3년을 복역했다.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썼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냈다. 88편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이 무엇인가를 두고 오래 읽혀 왔다. 조국인가 부처인가 사랑하는 이인가. 그는 서문에서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만 적었다.
【그래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집을 지었다 — 성북동 심우장이 북향인 이유다.
1944년 6월 심우장에서 죽었다. 광복을 1년 앞두고였다. 예순여섯이었다.
【남은 것】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사람이 손에 꼽힌다. 그가 그중 하나다.
승려이면서 시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다. 세 가지를 따로 하지 않았다 — 그에게는 같은 일이었다.
「나는 참으로 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님을 사랑하는 것은 님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서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저항이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일이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도에서 보기: 192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플레밍 허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