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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지자 노동력이 귀해지고 농노제가 흔들렸다. 몽골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오스만과 명이 들어섰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잉글랜드 왕과, 대륙에 남은 잉글랜드 영지를 거두려는 프랑스 왕이 부딪혔다. 플랑드르의 모직 이권도 걸려 있었다.
결과116년 만에 프랑스가 대륙에서 잉글랜드를 몰아냈다. 양국 모두 국민 의식이 생겨났다.
이성계를 찾아가 새 나라를 함께 그렸다. 한양의 궁궐과 사대문 이름을 유교의 덕목에서 따 지었다. 왕이 아니라 재상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썼다.
위화도에서 회군해 고려를 대신할 왕조를 세웠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다.
성리학을 세운 신진사대부이면서 고려를 고쳐 쓰자는 쪽에 섰다. 선죽교에서 죽었다. 고려는 석 달 뒤 끝났다.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친 명장. 요동 정벌을 주장했으나 위화도에서 군대가 돌아오면서 처형됐다.
칭기즈 칸의 혈통이 아니어서 칸을 칭하지 못하고 사위라 했다. 35년을 정복만 했다. 1402년 오스만의 술탄을 사로잡아,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50년을 더 살았다.
콜럼버스보다 90년 앞서 수백 척의 대함대로 동아프리카까지 갔다. 그러나 명은 항해를 멈추고 배를 태웠다.
튀니스 출신으로 여러 왕조를 섬기며 관료·재판관으로 일했다. 저서 「무깟디마」(역사서설)에서 왕조의 흥망을 유목민의 결속력(아사비야)과 도시 정착 후의 쇠퇴로 설명해, 근대 사회학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중국이 극비로 지키던 화약 제조법을 원나라 상인에게서 알아내 고려에서 처음으로 화약을 만들었다. 화통도감을 세워 각종 화포를 개발하고, 진포 해전에서 화포로 왜구 선단을 궤멸시켰다.
프라하에서 면벌부와 교회의 부를 비판했다. 안전을 보장받고 공의회에 갔다가 화형당했다. 그를 따르던 이들이 일어나 15년을 싸웠다.
홍건적의 난에서 몸을 일으켜 몽골을 북으로 내쫓았다. 재상제를 없애고 공신 수만 명을 숙청해 황제 독재의 틀을 만들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1394 · 왕이 아니라 재상이 다스려야 한다
이성계를 찾아가 새 나라를 함께 그렸다. 한양의 궁궐과 사대문 이름을 유교의 덕목에서 따 지었다. 왕이 아니라 재상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썼다.
【그때 그 자리】 1342년에 났다. 외가 쪽에 노비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평생 공격받았다.
1375년 원의 사신을 맞으라는 명을 거부해 전라도 나주 회진현으로 유배됐다. 그곳 부곡에서 3년을 살았다.
거기서 백성을 보았다. 「내가 글을 읽었다고 하나 저들이 나를 먹인다」는 깨달음이 그의 글에 남아 있다. 이 유배가 그를 바꿨다는 것이 정설이다.
【왜 그렇게 됐나】 1383년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그 군대를 보고 「이 정도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했다.
위화도 회군 뒤 과전법을 밀어붙였다. 권문세족의 토지 문서를 개경 한복판에서 태웠는데 사흘을 탔다고 한다. 새 왕조의 재정 기반이 여기서 나왔다.
1392년 조선이 섰다. 나라 이름, 한양 천도, 궁궐과 사대문의 이름을 모두 그가 정했다. 경복궁·근정전·사정전·인정전,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 — 유교의 덕목을 도시에 새긴 것이다.
【어떻게 흘렀나】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에서 그가 그린 나라는 재상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음과 현명함, 강함과 유약함의 차이가 있으니, 재상은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아야 한다.」
왕은 좋은 재상을 고르는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세습되는 왕은 고를 수 없지만 재상은 고를 수 있다.
이방원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었다. 쉰일곱이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제도는 남고 그가 그린 원리는 지워졌다. 조선은 그의 설계 위에서, 그가 반대한 왕 중심으로 굴러갔다.
역적으로 몰려 500년간 신원되지 못했다.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이 궁을 설계한 사람」이라며 복권했다.
【남은 것】 재상 정치가 실현됐다면 조선이 달랐을까 하는 물음이 오래 이어진다.
다만 그가 말한 재상은 뽑힌 사람이 아니라 왕이 고른 사람이다. 근대의 의회와 같지 않다. 그래도 왕의 자질에 나라를 맡기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14세기에 나온 생각치고는 멀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