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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백년전쟁 패배로 귀족들이 프랑스 영지를 잃고 국내로 돌아왔다. 헨리 6세의 정신 질환이 권력 공백을 만들었다.
결과보즈워스에서 리처드 3세가 전사하고 튜더 왕조가 열렸다. 대귀족이 서로를 소모시킨 끝에 왕권이 오히려 강해졌다.
왜결혼으로 합쳐진 두 왕국이 마지막 이슬람 영토를 노렸다. 새 화포가 산성을 하나씩 열었다.
결과781년의 레콘키스타가 끝났다. 같은 해 콜럼버스가 출항했고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다 — 스페인의 세계 제국과 종교적 획일화가 동시에 시작됐다.
노트 속에 미래를 그린 사람
인도로 가는 서쪽 길을 찾다 아메리카에 닿았다.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해 두 왕국을 합쳤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그해 콜럼버스에게 배 세 척을 내주었다.
장군으로 손니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다. 메카 순례 뒤 팀북투를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키웠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캘리컷에 도착했다. 향료 무역의 길이 바뀌었고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주인이 됐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신 앞의 평등과 카스트 부정을 설파하며 시크교를 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아홉 명의 구루를 거쳐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로 집대성됐다.
14세에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가 됐다. 12이맘 시아파를 강제해 수니파 이웃들과 갈라선 페르시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나왔다.
조각가를 자처했으나 교황의 명으로 4년간 천장에 매달려 「천지창조」를 그렸고, 여든 넘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다.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 피렌체 외교관이 실직 후 쓴 얇은 책이 근대 정치학의 출발이 됐다.
교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그리스어 신약을 펴냈다. 루터에게 길을 열었지만 분열은 거부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1490 · 노트에만 남은 미래
노트 속에 미래를 그린 사람
【그때 그 자리】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는 기술자를 겸하는 일이 흔했지만, 다빈치만큼 관찰·해부·공학을 그림 실력과 결합한 사람은 드물었다.
【왜 그렇게 됐나】
피렌체 근교의 사생아로 태어나 정규 라틴어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화가의 공방에서 도제로 훈련받으며 관찰력을 키웠다.
【어떻게 흘렀나】
시신을 직접 해부해 근육과 뼈의 구조를 정밀하게 그렸고, 새의 비행을 관찰해 하늘을 나는 기계를 설계했으며, 물의 흐름과 지층의 형성을 노트에 기록했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독특한 필체로 수천 쪽에 이르는 노트를 남겼다.
【그래서】
헬리콥터·전차·낙하산 같은 설계도 다수 그렸지만 대부분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 당시 기술로 구현할 수 없었거나, 애초에 발표할 생각이 없는 개인 연구 노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은 것】
그의 노트는 죽은 뒤 여러 소유자를 거치며 흩어졌고 상당수는 한참 뒤에야 학계에 알려졌다. 미래를 앞서 그렸지만 정작 그 앞섬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수백 년 뒤였다.
지도에서 보기: 14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콜럼버스 이사벨 1세 아스키아 무함마드 바스쿠 다가마 구루 나낙 이스마일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