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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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공화정의 위기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했지만 그 부가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이 유혈로 끝나고, 군벌들이 사병을 거느리며 내전이 반복됐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1건

켈티베리아·루시타니아 전쟁BC 181 – BC 133
로마 vs 이베리아 부족

히스파니아의 은광을 노린 로마가 내륙 부족과 부딪쳤다. 부족들은 정면 대결 대신 매복과 기습으로 맞섰다.

비리아투스의 저항 BC 147누만티아 공성 BC 134

결과누만티아는 8개월 포위 끝에 주민이 스스로 도시를 불태우고 자결했다. 로마가 「게릴라전」이라는 문제를 처음 만난 전쟁이다.

48년 · 로마의 첫 장기 소모전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3명

한 무제정치BC 141 · 한을 제국으로 만든 황제
BC 156 – BC 87

54년을 다스리며 흉노를 밀어내고 서역으로 길을 열었다. 유교를 국가의 학문으로 세운 것도 그다.

  • 흉노 원정과 하서 4군 설치
  • 장건을 서역에 보내 실크로드를 엶
  • 유교를 관학으로 — 이후 2,000년의 틀
장건정치BC 138 · 길을 연 사람
BC 164 – BC 114

흉노를 협공할 동맹을 찾아 서역으로 떠났다가 10년을 포로로 지냈다. 탈출해 임무를 마치고 13년 만에 돌아왔다.

  • 13년 만의 귀환 — 서역 36국을 보고
  • 실크로드의 실질적 개척
  • 포도·석류·목숙이 중국에 들어옴
그라쿠스 형제정치BC 133 · 땅을 나누려다 맞아 죽었다
BC 168 – BC 121

정복으로 부자가 된 귀족이 농지를 독점하자 자영농이 사라졌다. 형제가 차례로 토지 개혁을 시도했다가 차례로 살해됐다.

  • 농지법 — 토지 소유 상한을 두려 함
  • 호민관 권한으로 원로원과 충돌
  • 둘 다 정치 폭력에 죽음 — 공화정 몰락의 신호

그 무렵의 사건

BC 138
장건의 서역행
한 사람이 길을 열어 실크로드가 됐다.
한 무제가 흉노를 협공할 동맹을 찾아 장건을 보냈다. 13년 만에 돌아온 그는 동맹은 못 구했지만 서역의 나라들을 보고했고, 그 정보가 실크로드 교역의 시작이 됐다.
BC 146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같은 해에 두 도시가 지워졌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불태우고 몇 달 뒤 코린토스도 파괴했다. 지중해 서쪽과 동쪽의 마지막 경쟁자가 함께 사라진 해로, 로마의 지중해 지배가 여기서 확정된다.
BC 100
옥저와 동예
고조선이 무너진 뒤 함경도·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라는 작은 나라들이 자리 잡았다. 둘 다 왕이 없이 각 읍락을 우두머리(읍군·삼로)가 다스렸다.
옥저는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해 고구려에 공물로 바쳤고, 신랑이 어릴 신부를 미리 데려가 키운 뒤 성인이 되면 정식 혼인하는 민며느리제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동예는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면 노비나 가축으로 배상하게 하는 책화라는 제도와,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천이라는 축제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 모두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훗날 고구려에 흡수됐다.
BC 100
삼한(마한·진한·변한)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작은 나라들의 연맹체가 자리했다. 이들을 통틀어 삼한이라 부르며, 훗날 각각 백제·신라·가야로 발전해 나갔다.
삼한은 각 소국마다 정치를 맡는 우두머리(신지·읍차 등)와,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따로 있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구역인 소도에서는 죄인이 도망쳐 들어와도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변한 지역은 철이 풍부해 낙랑·왜 등에 수출했으며, 이 철 생산 기반은 훗날 가야 연맹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BC 194
위만조선 성립
연나라 출신 위만이 고조선 준왕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세력을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됐다.
중국이 전국시대 혼란과 진·한 교체기의 격변을 겪던 시기, 연나라 사람 위만은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해 왔다. 준왕은 그를 믿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자리를 맡겼는데, 위만은 그 병력을 발판 삼아 도읍 왕검성을 기습해 준왕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했다(기원전 194년 무렵). 쫓겨난 준왕은 뱃길로 남쪽으로 내려가 한(韓)의 땅에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위만은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했지만, 그 이전 단군·기자 계통과는 다른 새 왕조라는 뜻에서 오늘날 역사학계는 이를 「위만조선」이라 구분해 부른다. 위만조선은 이후 손자 우거왕 대에 이르러 한 무제의 침공으로 멸망했다(기원전 108년).

교역로 1개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한 무제

인물 · BC 141 · 한을 제국으로 만든 황제

54년을 다스리며 흉노를 밀어내고 서역으로 길을 열었다. 유교를 국가의 학문으로 세운 것도 그다.

【그때 그 자리】

기원전 202년 유방이 세운 한은 처음 60년을 조용히 보냈다. 진의 가혹한 법에 질린 뒤라 백성을 쉬게 하는 정책을 폈다. 문제와 경제 때 창고에 곡식이 썩고 돈을 꿴 줄이 삭을 만큼 재정이 쌓였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안으로는 제후왕들이 힘을 갖고 있었고, 밖으로는 흉노가 있었다. 유방이 흉노에게 포위됐다 겨우 풀려난 뒤로 한은 공주를 시집보내고 비단을 바치며 화친을 유지했다. 사실상 조공이었다.

【왜 그렇게 됐나】

기원전 141년 열여섯에 즉위한 무제는 쌓인 것을 쓰기로 했다.

먼저 안을 정리했다. 추은령을 내려 제후의 땅을 아들들에게 고르게 나눠 주게 했다. 은혜를 베푸는 형식이었지만 결과는 제후국이 잘게 쪼개져 힘을 잃는 것이었다.

이념도 하나로 했다.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 유교만 남기고 다른 학파를 물렸다.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으로 관리를 길렀다. 이후 2천 년간 중국의 통치 이념이 여기서 정해졌다.

【어떻게 흘렀나】

흉노와 40년 넘게 싸웠다. 위청과 곽거병이 고비 사막을 넘어 쳤다. 흉노가 북쪽으로 밀려났다.

이 전쟁 때문에 장건을 서역에 보냈다. 흉노를 협공할 동맹을 찾으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흉노에 붙잡혀 10년을 억류됐다 탈출하고, 13년 만에 돌아왔다. 동맹은 못 얻었지만 서역의 나라들과 물산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실크로드가 여기서 열렸다.

영토가 사방으로 넓어졌다. 남으로 베트남 북부, 서로 중앙아시아, 그리고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 등 군현을 두었다.

전쟁에는 돈이 든다. 소금과 철을 국가 전매로 돌리고, 균수법과 평준법으로 물자를 국가가 사고팔았다. 상인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재산을 신고하지 않으면 몰수했다. 화폐를 다시 찍었다.

말년에 대가가 왔다. 백성이 궁핍해지고 반란이 일었다. 기원전 91년에는 무고의 화라 하여 저주 사건으로 태자를 포함해 수만 명이 죽었다. 무제는 뒤에 이를 후회하고 윤대의 조서를 내려 정벌을 멈추고 농사에 힘쓰겠다고 했다. 황제가 자기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드문 기록이다.

【그래서】

54년을 다스렸다. 영토를 두 배로 넓혔고 유교 국가의 틀을 세웠으며 실크로드를 열었다. 동시에 재정을 소진하고 인구를 줄였다.

【남은 것】

한국사에서 그는 고조선을 무너뜨린 사람이다. 낙랑군이 313년까지 이어지며 한반도에 중국 문물이 들어오는 통로가 됐다.

사마천이 그의 시대 사람이다.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하고도 사기를 끝냈다. 무제에 대한 서술이 냉정한 것은 그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진시황과 자주 비교된다. 둘 다 넓히고 통일하고 백성을 갈아 넣었다. 진은 15년 만에 망했고 한은 400년을 갔다. 차이가 무엇이었는가는 오래된 질문인데, 무제가 말년에 방향을 튼 것과 뒤이은 황제들이 다시 쉬는 정책으로 돌아간 것이 자주 꼽힌다.

지도에서 보기: BC 2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장건 그라쿠스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