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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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몽골의 세기

유라시아 대부분이 한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역참으로 동서가 이어져 사람과 물자와 역병이 함께 흘렀다.

한반도

원 간섭기

몽골과 강화한 뒤 원의 부마국이 됐다.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조는 이미 기울었다.

전쟁 3건

무신정권의 성립1170 – 1270
고려 무신 vs 문신

문신이 무신을 천대하는 관행이 쌓였다. 의종의 보현원 행차에서 폭발했다.

보현원의 변 1170김보당의 난 1173삼별초 항쟁 1270

결과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쳐 최씨 정권이 60년을 이었다. 몽골 침입에 강화도로 옮겨 항전했고,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까지 물러나며 끝까지 싸웠다.

100년 · 무인의 시대
몽골의 정복1206 – 1279
몽골 제국 vs 금·호라즘·러시아 제후국·아바스·남송

부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에게 유목 연합체를 유지할 전리품과 목초지가 필요했다. 호라즘이 사신단을 처형한 것이 서방 원정의 방아쇠가 됐다.

호라즘 1219–1221칼카강 1223레그니차 1241바그다드 1258애산 1279

결과73년에 걸쳐 태평양에서 동유럽까지 이어지는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이 만들어졌다.

73년 ·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이 만들어졌다
여몽연합군 일본원정1274 – 1281
원·고려 연합 vs 가마쿠라 막부

쿠빌라이가 일본에 조공을 요구했으나 가마쿠라 막부가 거부했다. 고려는 함선과 병력을 대야 했다.

분에이 1274고안 1281

결과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궤멸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풍'이라 불렀다.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4명

쿠빌라이 칸정치1271 · 원 세조
1215 – 1294

국호를 대원으로 정하고 남송을 무너뜨렸다. 중국 전역이 처음으로 유목 왕조 아래 들어갔다.

  • 국호를 대원으로 1271
  • 남송을 무너뜨림 1279
  • 대도(오늘의 베이징) 건설
토마스 아퀴나스사상1270 · 신앙과 이성을 하나로 엮은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
1225 – 1274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 안으로 들여왔다. 「신학대전」은 가톨릭 신학의 기둥이 됐다.

  • 「신학대전」「대이교도대전」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독교적 수용
  • 신 존재의 다섯 가지 길
마르코 폴로탐험1275 · 쿠빌라이의 궁정을 유럽에 알린 베네치아 상인
1254 – 1324

17년을 원나라에서 보내고 돌아와 감옥에서 구술한 「동방견문록」이 콜럼버스를 바다로 이끌었다.

  • 실크로드를 거쳐 원 대도 도착(1275)
  • 쿠빌라이 칸 아래서 17년 체류
  • 「동방견문록」 구술(1298)
쩐흥다오장군1288 · 몽골을 세 번 막은 장수
1228 무렵 – 1300

대월의 장수로 몽골의 세 차례 침입을 막았다. 1288년 바익당강 바닥에 쇠말뚝을 박아 두고 썰물에 함대를 걸리게 했다.

  • 바익당강 — 강바닥 말뚝
  • 몽골 침입 3회 격퇴
  • 격장사 — 병사에게 부친 글

그 무렵의 사건

1280
폴리네시아의 항해
나침반 없이 태평양을 건넜다.
별의 위치, 물결이 섬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결,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읽었다. 하와이에서 뉴질랜드까지 태평양 전역에 같은 계통의 사람들이 퍼졌다. 유럽이 대양으로 나가기 수백 년 전이다.
1251
팔만대장경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길 기원하며 16년에 걸쳐 8만 장이 넘는 목판에 불경 전체를 새긴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
거란의 침입 때도 대장경을 만들어 위기를 넘긴 전례가 있었는데, 그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에 항전하던 고려 조정은, 온 나라의 정성을 모아 부처의 가피를 구한다는 뜻에서 다시 대장경 조판 사업을 벌였다. 8만여 장에 이르는 목판에 새긴 5천만 자가 넘는 글자는 오탈자가 거의 없을 만큼 정교해,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 판본 중 하나로 꼽히며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다.
1291
스위스 연방 성립
1291년, 알프스 산속 세 계곡 공동체(우리·슈비츠·운터발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맞서 서로 돕기로 서약하며 스위스 연방의 첫 씨앗을 뿌렸다.
이후 여러 산악 공동체와 도시들이 하나둘 이 동맹에 합류하며 서서히 몸집을 키웠고, 지형적 이점을 살린 저항으로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지켜냈다. 오랜 중립 전통은 이후 국제 외교와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1300
짐바브웨의 번성과 쇠퇴
모르타르 없이 돌만 쌓아 사하라 이남 최대의 석조 도시를 세웠다.
쇼나족이 세운 도시로, 중국 도자기와 페르시아 유리구슬이 나올 만큼 먼 곳과 교역했다. 20세기 초 백인 식민 당국은 「아프리카인이 이런 걸 지었을 리 없다」며 페니키아인이나 아랍인의 것이라 주장했다 — 1929년 고고학자 캐턴톰프슨의 발굴로 완전한 아프리카 기원임이 확인됐다. 왜 1450년 무렵 버려졌는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 교역로가 해안으로 옮겨갔다는 설, 삼림 파괴와 지력 소진이라는 설, 소빙하기 가뭄이라는 설이 나란히 있다.
1234
금속활자
고려가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찍었다.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이르다.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이르다. 다만 한자 문화권에서는 인쇄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1324
말리 제국의 전성기
14세기, 서아프리카의 말리 제국은 황금과 소금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황제 만사 무사가 1324년 메카 순례길에 어마어마한 금을 뿌리듯 쓴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개인의 사례로 회자된다. 그가 지나간 카이로 등지에서는 이 대량의 금 유입으로 물가가 한동안 폭등했을 정도였다. 제국의 중심지 팀북투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도 이름을 떨쳐, 서아프리카 곳곳에서 학자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내부 계승 다툼과 외부 세력의 압박으로 15~16세기에 걸쳐 서서히 쇠퇴했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쿠빌라이 칸

인물 · 1271 · 원 세조

국호를 대원으로 정하고 남송을 무너뜨렸다. 중국 전역이 처음으로 유목 왕조 아래 들어갔다.

【그때 그 자리】

칭기즈 칸의 손자로 1215년에 났다. 몽골은 이미 유라시아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하나는 남송이다. 양쯔강과 수많은 성과 화약 무기를 갖춰 초원 기병이 쉽게 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방향이었다. 정복한 정주 지역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초원의 전통을 지키자는 쪽과 현지 방식을 받아들이자는 쪽이 갈렸다. 한때 몽골 안에서 화북의 농경지를 갈아엎어 목초지로 만들자는 논의까지 있었다. 세금을 걷는 편이 낫다는 야율초재의 설득으로 무산됐다.

【왜 그렇게 됐나】

쿠빌라이는 후자를 택했다. 젊어서부터 한족 지식인을 곁에 두고 배웠다.

1259년 몽케 칸이 죽자 동생 아릭 부케와 4년을 싸웠다. 이 다툼은 형제 싸움이자 노선 싸움이었다. 아릭 부케는 초원의 전통을 대표했고 쿠빌라이는 중국화를 대표했다.

쿠빌라이가 이겼다. 다만 이 내전으로 몽골 제국의 통일성이 깨졌다. 서쪽의 칸국들이 사실상 독립했다.

【어떻게 흘렀나】

1271년 국호를 원으로 정했다. 몽골식 이름이 아니라 주역의 대재건원에서 딴 한자 국호다. 수도를 대도, 지금의 베이징에 새로 지었다.

1279년 남송을 없앴다. 마지막에 어린 황제를 안고 신하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통치는 이중적이었다. 중국식 왕조의 겉을 갖추되, 신분을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으로 나눠 몽골인의 지배를 유지했다. 과거제를 오래 정지시켰다.

동시에 열려 있었다. 이슬람 천문학자를 데려와 역법을 고치게 했고, 티베트 불교를 우대했으며, 각지의 상인과 사절을 받았다. 마르코 폴로가 그의 궁정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밖으로는 계속 밀었다. 1274년과 1281년 일본 원정은 두 번 다 태풍으로 실패했다. 베트남과 자바 원정도 성과가 없었다. 초원과 다른 기후와 지형에서 몽골식 전쟁이 통하지 않았다.

고려와는 사위의 나라 관계를 맺었다. 1259년 고려 태자가 강화하러 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이 쿠빌라이다. 당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왔다며 기뻐했다고 기록됐다. 고려가 왕조와 제도를 유지한 데는 이 첫 만남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그래서】

1294년 죽었다. 원은 그 뒤 74년을 더 갔다.

【남은 것】

그는 몽골 제국을 중국 왕조로 바꾼 사람이다. 이 선택 덕에 원이 중국을 100년 가까이 다스릴 수 있었고, 동시에 이 선택 때문에 서쪽 칸국들과 멀어졌다.

역참제로 유라시아가 이어져 사람과 물자와 정보가 오갔다. 화약과 나침반과 인쇄술이 서쪽으로 간 것도, 흑사병이 서쪽으로 간 것도 이 길이다.

영국 시인 콜리지가 1797년 쓴 시 쿠블라 칸이 서양에서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했다. 실제 인물과는 거의 상관없는 몽환적인 시다. 정복자의 이름이 낯선 동방의 상징으로 소비된 예다.

지도에서 보기: 12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코 폴로 쩐흥다오 오스만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