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산업화한 열강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나눠 가졌다. 동맹 체제가 굳어지며 국지 분쟁이 전면전으로 번질 구조가 만들어졌다.
국권을 잃고 35년. 3·1운동과 임시정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왜35년 독재 아래 땅이 소수에게 몰렸다.
결과열 해 동안 100만 명 넘게 죽었다. 사파타도 비야도 끝을 보지 못했지만 1917년 헌법에 토지개혁과 노동권이 들어갔다. 20세기 첫 사회혁명으로 꼽힌다.
왜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자 동맹 체제가 도미노처럼 작동했다. 발칸의 국지 분쟁이 6주 만에 대륙 전쟁이 됐다.
결과네 개 제국이 무너지고 유럽 지도가 통째로 다시 그려졌다.
왜러시아로 가는 바닷길을 열려고 다르다넬스로 상륙했다.
결과여덟 달 동안 양쪽에서 50만이 죽거나 다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났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이날을 자기 나라가 시작된 날로 기억하고, 터키는 케말이라는 이름을 여기서 얻었다.
당장 싸우는 것보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봤다. 미국에서 동포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웠다.
전자가 정해진 궤도만 돈다는 원자모형으로 양자역학의 문을 열었다.
모델 T를 조립라인에서 93분에 한 대씩 만들어 값을 세 배 낮췄다. 노동자에게 하루 5달러를 주어 자기 차를 사게 했다.
대륙이 움직인다고 말한 사람
삼민주의를 내걸고 열 번 봉기해 열 번 실패했지만 신해혁명으로 2천 년 제정을 끝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그를 국부로 받든다.
남부 농민들을 이끌고 빼앗긴 공유지를 되찾으려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약속은 미뤄졌고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매복에 걸려 죽었다.
원자핵을 발견하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재판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역사는 나와 남의 싸움이라고 썼다. 을지문덕전을 써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 자체가 힘이 된다고 봤다.
열일곱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졌다.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군을 조직했다.
민족자결을 말해 3·1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정작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독립군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 암살당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넉 달 사이 논문 네 편으로 물리학을 바꿨다. 1919년 일식 관측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첫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나중엔 그의 꼭두각시가 됐고,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거꾸로 매달렸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뒤, 튀르크 독립전쟁을 이끌어 그리스와 연합국의 분할 시도를 막아냈다. 1923년 술탄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다.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 모래언덕에서 12초, 36m. 자전거 가게를 하던 두 형제가 하늘을 열었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흑체복사 문제를 풀려고 에너지가 최소 단위로만 오간다고 가정했다. 그렇게 양자역학이 시작됐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는 방정식을 세우고, 양자역학의 역설을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짚었다.
꿈은 억압된 소원의 실현이고 사람은 스스로 모르는 힘에 이끌린다. 그의 이론은 심리학과 문학, 일상의 말까지 바꿨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원리를 내놨다.
헛간 실험실에서 광석을 정제해 새 원소를 분리했다.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
우연히 자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은하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측으로 밝혀 팽창 우주를 증명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세력 사이에서 통치했다.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을 거쳐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강제 퇴위당했다.
소금 행진으로 비폭력 불복종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탈리아의 침공을 아드와에서 격퇴했다. 아프리카가 유럽 군대를 정면에서 이긴 드문 예이고, 그래서 에티오피아만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뒤,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을 앞세운 폭압적 통치를 이어갔다. 아이티계 주민 수천~수만 명을 학살한 1937년 '파슬리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이끄는 여론을 일으켰다.
친러 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조선 침탈에 방해가 된다고 본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그를 시해했다(을미사변).
아버지가 고부군수의 수탈에 항의하다 맞아 죽었다. 키가 작아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우금치에서 기관총 앞에 무너졌다.
스물넷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한 번으로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한 것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과 도시국가를 정복·통합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왕이 됐다.
노예제를 없애고 관료제와 학교와 철도를 들였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땅 일부를 내주며 균형을 잡았다.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다.
드비어스로 다이아몬드를 독점하고 케이프 식민지 총리가 됐으며 자기 이름을 딴 로디지아를 만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별도 병합하겠다」고 했다.
무솔리니의 침공에 맞서 제네바에서 「오늘은 우리, 내일은 당신들」이라 경고했다. 44년을 다스렸고 라스타파리는 그를 신으로 섬긴다.
불황엔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 그의 「일반이론」은 전후 30년 서방 경제정책의 교과서였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했다.
북벌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일본과 공산당 사이에서 싸우다 1949년 대륙을 잃었다. 타이완에서 계엄으로 26년을 다스렸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회화를 깨뜨렸고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상을 고발했다. 91년 동안 5만 점을 만들었다.
에디슨의 직류에 맞서 교류 모터와 송전을 만들어 오늘의 전력망을 결정했다. 무선 전력의 꿈을 좇다 가난하게 죽었다.
1936년 공화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3년간의 내전 끝에 승리했다. 1975년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권위주의 체제로 통치했다.
빈의 낙방 화가에서 독일 총통이 됐다.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으며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해당 없음
인물 · 1913 · 실력을 기르자, 그러나 준비만 하지는 말자
당장 싸우는 것보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봤다. 미국에서 동포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웠다.
【그때 그 자리】 1878년 평남 강서에서 났다. 열일곱에 서울로 올라와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에서 배웠다.
1902년 미국으로 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들이 인삼 상권을 두고 길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유학을 접었다. 「우리부터 사람이 되자.」
한인 집집을 돌며 유리창을 닦고 화단을 가꿨다. 그 모습을 본 미국인 집주인들이 한인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왜 그렇게 됐나】 1907년 귀국해 신민회를 만들었다. 비밀결사다.
대성학교(평양)와 오산학교(정주)를 세우고 태극서관과 자기회사를 열었다. 동시에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준비했다 — 신흥무관학교가 여기서 나온다.
「실력을 기르자」가 그의 말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준비만 하자고 한 적이 없다. 무장투쟁 기지를 함께 만들었다.
【어떻게 흘렀나】 1913년 흥사단을 세웠다. 무실역행(務實力行) — 참되기를 힘쓰고 행하기를 힘쓴다.
1919년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다. 상하이·연해주·한성의 세 정부를 하나로 묶은 것이 그의 일이다.
이승만과 이동휘가 갈리자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봉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이다」 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뒤 상하이에서 체포됐다. 그날 한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러 나갔다가 잡혔다.
【그래서】 국내로 압송돼 복역하다 병으로 나왔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잡혔다. 1938년 경성제대 병원에서 죽었다. 예순이었다.
「낙심 마오」가 마지막 말이었다고 전한다.
【남은 것】 그의 노선은 오래 「타협적」이라 비판받았다. 무장투쟁이 아니라 교육과 실력 양성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교와 회사와 군사기지를 동시에 만들었고, 임시정부의 분열을 끝까지 봉합하려 했다. 어느 한쪽에 서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에서 미움을 샀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는 말이 흥사단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