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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산업화한 열강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나눠 가졌다. 동맹 체제가 굳어지며 국지 분쟁이 전면전으로 번질 구조가 만들어졌다.
황제국을 선포하고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
왜만주에 눌러앉은 러시아와 조선을 노리는 일본이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지 못했다. 협상이 깨지자 일본이 뤼순을 기습했다.
결과일본이 러시아를 꺾고 한반도 지배권을 확보했다. 5년 뒤 병합으로 이어진다.
왜35년 독재 아래 땅이 소수에게 몰렸다.
결과열 해 동안 100만 명 넘게 죽었다. 사파타도 비야도 끝을 보지 못했지만 1917년 헌법에 토지개혁과 노동권이 들어갔다. 20세기 첫 사회혁명으로 꼽힌다.
역사는 나와 남의 싸움이라고 썼다. 을지문덕전을 써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 자체가 힘이 된다고 봤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재판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남부 농민들을 이끌고 빼앗긴 공유지를 되찾으려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약속은 미뤄졌고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매복에 걸려 죽었다.
넉 달 사이 논문 네 편으로 물리학을 바꿨다. 1919년 일식 관측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원자핵을 발견하다
대륙이 움직인다고 말한 사람
삼민주의를 내걸고 열 번 봉기해 열 번 실패했지만 신해혁명으로 2천 년 제정을 끝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그를 국부로 받든다.
당장 싸우는 것보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봤다. 미국에서 동포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웠다.
전자가 정해진 궤도만 돈다는 원자모형으로 양자역학의 문을 열었다.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 모래언덕에서 12초, 36m. 자전거 가게를 하던 두 형제가 하늘을 열었다.
모델 T를 조립라인에서 93분에 한 대씩 만들어 값을 세 배 낮췄다. 노동자에게 하루 5달러를 주어 자기 차를 사게 했다.
흑체복사 문제를 풀려고 에너지가 최소 단위로만 오간다고 가정했다. 그렇게 양자역학이 시작됐다.
꿈은 억압된 소원의 실현이고 사람은 스스로 모르는 힘에 이끌린다. 그의 이론은 심리학과 문학, 일상의 말까지 바꿨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헛간 실험실에서 광석을 정제해 새 원소를 분리했다.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
열일곱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졌다.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광복군을 조직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세력 사이에서 통치했다.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을 거쳐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강제 퇴위당했다.
민족자결을 말해 3·1운동에 불을 붙였다.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정작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이탈리아의 침공을 아드와에서 격퇴했다. 아프리카가 유럽 군대를 정면에서 이긴 드문 예이고, 그래서 에티오피아만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이끄는 여론을 일으켰다.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독립군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가다 암살당했다.
포수 출신으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친러 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조선 침탈에 방해가 된다고 본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그를 시해했다(을미사변).
아버지가 고부군수의 수탈에 항의하다 맞아 죽었다. 키가 작아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우금치에서 기관총 앞에 무너졌다.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첫 파시스트 독재자.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나중엔 그의 꼭두각시가 됐고,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거꾸로 매달렸다.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뒤, 튀르크 독립전쟁을 이끌어 그리스와 연합국의 분할 시도를 막아냈다. 1923년 술탄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다.
3·1 운동 33인 가운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다. 님의 침묵에서 님은 잃은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노예제를 없애고 관료제와 학교와 철도를 들였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땅 일부를 내주며 균형을 잡았다.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는 방정식을 세우고, 양자역학의 역설을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짚었다.
드비어스로 다이아몬드를 독점하고 케이프 식민지 총리가 됐으며 자기 이름을 딴 로디지아를 만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별도 병합하겠다」고 했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원리를 내놨다.
우연히 자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에디슨의 직류에 맞서 교류 모터와 송전을 만들어 오늘의 전력망을 결정했다. 무선 전력의 꿈을 좇다 가난하게 죽었다.
은하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관측으로 밝혀 팽창 우주를 증명했다.
소금 행진으로 비폭력 불복종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군 출신으로 쿠데타에 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뒤, 개인숭배와 비밀경찰을 앞세운 폭압적 통치를 이어갔다. 아이티계 주민 수천~수만 명을 학살한 1937년 '파슬리 학살'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백조목 플라스크로 미생물이 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최초로 광견병 백신을 사람에게 썼다.
조슈의 하급 무사에서 4번 총리가 됐다. 대일본제국 헌법을 기초했고, 을사늑약을 강요한 뒤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했다.
위에서 빠르게 바꾸려 했다. 일본의 힘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다. 사흘 만에 끝났고 10년 뒤 상하이에서 암살됐다.
스물넷에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한 번으로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한 것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과 도시국가를 정복·통합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왕이 됐다.
기독교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 불렀고 위버멘시와 영원회귀를 말했다. 44세에 광기에 빠졌고 그의 책은 20세기 사상을 뒤흔들었다.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찾다
해당 없음
인물 · 1908 ·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역사는 나와 남의 싸움이라고 썼다. 을지문덕전을 써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 자체가 힘이 된다고 봤다.
【그때 그 자리】 1880년 충남 대덕에서 났다.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벼슬을 버리고 언론으로 갔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을 썼다. 「독사신론」에서 종래의 역사 서술을 뒤집었다 — 왕조가 아니라 민족을 주어로 삼자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됐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중국으로 갔다.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며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직접 보았다.
「조선상고사」를 썼다. 첫머리가 유명하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라.」
단군에서 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줄기를 세우고,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로 우리 역사를 축소했다고 비판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부른 것도 그다.
【어떻게 흘렀나】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곧 갈라섰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두고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으나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팔아먹었다」고 했다.
1923년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썼다. 외교론과 준비론을 모두 부정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으로 강도 일본을 살벌하여야 한다.」
말년에는 무정부주의로 기울었다.
【그래서】 1928년 대만에서 자금을 마련하다 붙잡혀 뤼순 감옥에 갇혔다. 10년형을 받았다.
1936년 옥에서 죽었다. 쉰일곱이었다. 병보석을 권하자 친일파의 보증이 필요하다는 말에 거절했다고 전한다.
일제가 만든 호적에 오르기를 거부해 무국적자로 살았다. 대한민국 국적은 2009년에야 회복됐다 — 죽은 지 73년 만이다.
【남은 것】 그의 민족주의 사학은 식민사관에 맞서는 무기였다. 동시에 지나치게 웅대한 고대사를 그렸다는 비판도 받는다.
다만 그가 처한 자리를 봐야 한다. 나라가 없고 역사마저 남의 손으로 쓰이던 때에, 우리 역사를 우리 주어로 다시 쓰려 한 사람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그의 것으로 널리 인용되지만, 실제 그 문장은 그의 글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