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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100년. 그사이 몽골이 여섯 차례 침입했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했다.
왜문신이 무신을 천대하는 관행이 쌓였다. 의종의 보현원 행차에서 폭발했다.
결과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쳐 최씨 정권이 60년을 이었다. 몽골 침입에 강화도로 옮겨 항전했고,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까지 물러나며 끝까지 싸웠다.
왜다이라 가문이 조정을 독점하자 미나모토가 각지에서 거병했다.
결과단노우라 해전에서 다이라가 멸문하고 여덟 살 천황이 바다에 잠겼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막부를 열어 700년 무가 정치가 시작된다.
왜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한 살라흐 앗딘에게 십자군 국가는 포위된 형세였다. 휴전을 깬 약탈이 빌미가 됐다.
결과예루살렘이 다시 무슬림 손에 넘어갔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고 하틴에서 십자군을 꺾었다.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사서에 주석을 달고 이(理)와 기(氣)로 세계를 설명했다. 그의 학문이 조선의 국교가 됐다.
재위 10년 중 영국에 머문 것은 반년. 십자군에서 살라딘과 싸우고 돌아오다 붙잡혀 거액의 몸값이 치러졌다.
참파에 짓밟힌 뒤 나라를 되찾고 불교로 방향을 틀었다. 비문에 병원 102곳과 여관 121곳을 지었다고 적었다.
황제권을 세우려 이탈리아 원정을 여섯 번 했고, 십자군 원정 도중 강에서 익사했다. 산속에서 잠자며 독일을 기다린다는 전설이 됐다.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소개하다
흩어진 초원 부족을 하나로 묶었다. 그가 시작한 정복은 73년간 이어진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인물 · 1187 · 아이유브 술탄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고 하틴에서 십자군을 꺾었다.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그때 그 자리】
12세기 이슬람 세계는 갈라져 있었다.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는 이름뿐이었고, 이집트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는 순니파 장기 가문이 다스렸다. 서로 다른 종파로 나뉜 이 분열이 십자군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1099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90년이 지나 있었다. 십자군 국가 넷이 지중해 동안에 자리 잡았다.
【왜 그렇게 됐나】
살라흐 앗딘은 지금의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쿠르드족으로 났다. 아랍인도 튀르크인도 아닌 변방 출신이다.
삼촌을 따라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가 그곳에서 재상이 됐다. 1171년 파티마 왕조를 끝내고 이집트를 순니로 돌렸다. 1174년 시리아까지 아울렀다.
핵심은 여기다. 그는 십자군을 치기 전에 무슬림 세력을 먼저 하나로 묶는 데 12년을 썼다. 같은 편끼리 싸우던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고 봤다.
【어떻게 흘렀나】
1187년 7월 하틴에서 십자군 주력을 유인해 물 없는 고지에 가두었다. 갈증에 지친 기사단이 무너졌다.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 대부분이 하루에 사라졌다.
10월 예루살렘이 항복했다. 88년 전 십자군이 들어와 사흘간 학살한 그 도시다.
살라흐 앗딘은 학살하지 않았다. 몸값을 정해 지불한 사람을 풀어줬고, 못 내는 가난한 이들 상당수를 자기 돈으로 풀어줬다. 동생 알아딜이 1천 명을 달라 해서 풀어주고, 총대주교도 자기 몫으로 풀어줬다. 교회는 파괴되지 않았고 성묘교회는 기독교인에게 남겼다.
이 대비가 유럽에 그대로 전해졌다. 적의 기록이 그를 칭송한 드문 경우다.
1189년 3차 십자군이 왔다. 사자심왕 리처드와 2년을 싸웠다. 리처드가 병들자 살라흐 앗딘이 얼음과 과일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192년 협정이 맺어져 예루살렘은 무슬림이 갖되 기독교 순례는 자유롭게 허용하기로 했다.
1193년 다마스쿠스에서 죽었다. 재산이 거의 없어 장례비를 빌려야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1917년까지 이슬람 지배 아래 있었다.
【남은 것】
그는 유럽 문학에서 이상적인 기사로 그려졌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에 두면서도 벌받지 않는 고결한 이교도의 자리에 놓았다. 월터 스콧의 소설이 이 이미지를 굳혔다.
20세기 아랍 민족주의는 그를 통합의 상징으로 불렀다. 쿠르드족은 쿠르드의 영웅으로 부른다. 같은 사람을 여러 편이 각자의 근거로 삼는다.
관용이 약함이 아니라 힘의 표현일 수 있다는 사례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다만 그도 전쟁 중에 포로를 처형한 기록이 있다. 성인으로만 그리는 것은 그를 다시 한번 이야기의 재료로 쓰는 일이다.
지도에서 보기: 11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주희 리처드 1세 자야바르만 7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피보나치 칭기즈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