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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다퉜다. 성지 회복을 내건 원정이 시작되며 유럽이 처음으로 바깥을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왜동로마가 서방에 원군을 청했고, 교황이 성지 회복과 교회 통합을 내걸어 이를 대규모 원정으로 키웠다.
결과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들을 세웠다. 지중해 동안에 200년간 라틴 세력이 남는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이 군중에서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몽계필담을 쓴 박학한 관료
신법을 비판하다 여러 번 유배됐다. 시·산문·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황주 유배 시절의 「적벽부」가 대표작이다.
물을 다스려 일어선 나라의 절정이었다. 해자 한 변이 1.5킬로미터인 사원을 자기 무덤으로 지었다. 돌 500만 톤을 40킬로미터 밖에서 수로로 실어 왔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지명 · 1100 · 송가이의 학문 도시
【그때 그 자리】
사하라 사막 남쪽 가장자리, 니제르강이 북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지점이다.
이 위치가 전부다. 사막을 건너온 낙타 대상과 강을 거슬러 온 배가 만나는 자리다.
오가는 물건이 정해져 있었다. 남쪽에서 금이 올라오고 북쪽에서 소금이 내려왔다.
소금이 왜 중요한가. 더운 지역에서 사람과 가축이 살려면 소금이 필요한데 서아프리카 내륙에는 나지 않는다. 사하라의 암염 광산에서 캔 소금판을 낙타에 실어 왔다. 한때 소금과 금을 같은 무게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왜 그렇게 됐나】
11세기 무렵 유목민의 계절 야영지로 시작했다.
13세기 말리 제국이 이 지역을 아울렀다. 14세기 만사 무사가 절정을 만들었다.
1324년 그가 메카 순례를 떠났다. 수행원 6만 명에 금을 실은 낙타가 수백 마리였다고 전한다.
카이로를 지나며 금을 너무 많이 뿌려 그 지역 금값이 10년 넘게 회복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순례로 말리와 팀북투가 유럽에 알려졌다. 1375년 카탈루냐 지도에 금덩이를 든 만사 무사가 그려졌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학자와 건축가를 데려왔다. 진흙벽돌로 지은 징게레베르 모스크가 그때 세워졌다.
【어떻게 흘렀나】
15세기와 16세기 이 도시는 학문의 중심이 됐다.
상코레 모스크에 부속된 교육 기관에 학생이 2만 5천 명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도시 인구가 10만 안팎이었다.
신학과 법학과 천문학과 수학과 의학을 가르쳤다.
책이 최대의 상품이었다. 한 기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곳에서는 어떤 상품보다 책이 큰 이익을 남긴다.
필사본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소장됐다. 개인 장서가 수천 권인 집안이 여럿이었다.
1591년 모로코가 침공했다. 화승총을 가진 군대 앞에 송가이 제국이 무너졌다. 학자들이 붙잡히거나 추방됐다.
이후 대서양 항로가 열려 서아프리카 무역의 중심이 해안으로 옮겨갔다. 사하라 종단로의 비중이 줄었다.
【그래서】
19세기 유럽인에게 팀북투는 전설이 됐다. 황금의 도시가 사막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었다.
1828년 프랑스인 르네 카이에가 들어갔다가 크게 실망했다. 진흙 집이 늘어선 가난한 마을이었다.
영어에서 팀북투가 아주 먼 곳을 뜻하는 관용어가 됐다. 실제 도시가 아니라 닿을 수 없는 곳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남은 것】
필사본은 남았다. 사람들이 집과 사막에 숨겨 지켰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이 30만 점 이상이다.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문서로, 아랍어와 현지어로 적혔다.
내용이 다양하다. 천문 관측 기록, 수학 문제, 법률 문서, 상거래 계약서, 여성의 권리에 관한 논의, 노예제를 비판한 글도 있다.
이 문서들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에 문자 기록이 없었다는 오래된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때문이다.
2012년 이슬람 무장 세력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성인 묘와 문서를 파괴했다. 도서관 직원과 주민들이 필사본 35만 점을 몰래 상자에 담아 배와 트럭으로 남쪽 바마코로 옮겼다. 대부분을 지켰다.
2016년 국제형사재판소가 문화유산 파괴를 전쟁범죄로 인정한 첫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