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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세 개의 세계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한반도

고려 전기

호족 연합으로 선 왕조가 과거제와 관료제로 중앙집권을 다졌다. 거란·여진과 부딪히며 북방 경계를 지켰다.

전쟁 1건

바이킹 시대793 – 1066
노르드인 vs 유럽 각지

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린디스판 약탈 793파리 포위 885스탬퍼드 브리지 1066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273년 · 유럽 지도를 다시 그렸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3명

왕건정치918 · 고려 태조
877 – 943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정했다. 호족을 혼인으로 묶었다.

  • 후삼국 통일 936
  • 호족과 혼인으로 결속
  • 훈요십조를 남김
궁예정치901 · 후고구려를 세운 사람
? – 918

애꾸눈의 승려 출신으로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며 일어섰다.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며 관심법으로 사람을 죽이다 쫓겨났다.

  • 901년 후고구려 건국
  • 철원으로 천도, 국호를 태봉으로
  • 918년 왕건에게 쫓겨남
견훤정치900 · 후백제를 세운 사람
867 – 936

농민의 아들로 신라 군인이 되었다가 완산주에서 나라를 세웠다. 240년 전에 망한 백제의 이름을 다시 꺼냈다.

  • 900년 후백제 건국
  • 927년 공산에서 왕건을 대파
  • 아들에게 갇혔다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

그 무렵의 사건

918
고려 건국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정했다.
후삼국의 분열이 끝나고 과거제와 관료제가 자리 잡는다.
916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중동을 자기들끼리 나눠 갖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영국은 아랍인들에게는 독립을 약속하며 오스만에 맞서 봉기하도록 부추기는 한편, 프랑스와는 따로 세력권 분할을 협상하고 있었다. 이 이중 약속이 드러나며 아랍 세계의 서방 불신을 키웠다.
900
치첸이트사
마야 후기의 도시. 춘분에 쿠쿨칸 피라미드 계단에 뱀 그림자가 내려온다.
유카탄 반도의 저지대에 세워진 이 도시는 마야 고전기 도시들이 무너진 뒤 오히려 번성했다. 91계단짜리 사면에 꼭대기 한 단을 더해 365가 되는 엘 카스티요, 지름 60m의 천문대 카라콜, 길이 168m의 구기장이 있다. 톨텍의 영향으로 보이는 전사 조각과 인신공희의 흔적도 있다. 세노테(성스러운 우물)에서 금과 사람 뼈가 나왔다. 13세기에 버려졌다.
936
왕건의 후삼국 통일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뒤를 이은 세력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 있다가 궁예가 폭정을 일삼자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웠다(918년).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유폐당한 뒤 고려에 투항해오자, 왕건은 이를 명분 삼아 신검의 후백제를 정벌해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그는 지방 호족을 결혼 정책과 관직 하사로 포섭하고, 「훈요 10조」를 남겨 후대 왕들에게 통치 원칙을 전했다.
882
키예프 루스가 서다
바이킹이 강을 타고 내려와 세운 나라.
북에서 내려온 루스가 슬라브 부족들을 묶었다. 드네프르강을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교역했고, 988년 그곳의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가 모두 자기 뿌리로 삼는다 — 그래서 지금도 다툰다.
958
광종의 왕권 강화
고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시행해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
건국 초기 고려는 지방 호족들의 사병과 경제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 광종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노비를 원래 신분으로 되돌리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해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이어 중국의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처음 도입해, 가문이 아닌 시험 성적으로 관리를 뽑는 길을 열었다. 이런 개혁을 반발하는 공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렸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개경

지명 · 918 · 고려의 도읍. 지금의 개성

【그때 그 자리】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금의 개성이다.

왕건의 집안이 여기 송악의 해상 세력이었다. 예성강 하구 벽란도에서 중국과 교역하며 부를 쌓았다.

918년 왕건이 왕이 되고 이듬해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자기 기반으로 돌아온 것이다.

【왜 그렇게 됐나】

위치가 고려라는 나라의 성격을 만들었다.

벽란도가 30리 거리에 있었다. 예성강 하구의 이 항구는 수심이 깊고 조수를 타면 배가 곧장 들어왔다. 송과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왔다.

1024년과 1025년, 1040년에 대식국 상인이 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대식은 아라비아를 가리킨다. 이들이 부른 이름이 서양에 Corea로 전해졌다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수도가 바다에 가까운 나라는 성격이 다르다. 조선이 한양에 자리 잡고 안으로 향한 것과 대비된다.

【어떻게 흘렀나】

도시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았다. 송악산을 뒤로 하고 만월대에 궁궐을 두었다.

성이 세 겹이었다. 궁성과 황성 밖에 1029년 완성된 나성이 있었다. 둘레 23킬로미터로 강감찬의 건의로 쌓았다. 뒤에 내성이 추가됐다.

인구가 십수만에 이르렀다. 시전이 늘어서고 다점이라는 찻집이 있었다.

팔관회가 이 도시의 성격을 보여준다. 해마다 열린 이 행사에 송과 여진과 일본과 아라비아 상인이 참여해 물건을 바치고 교역했다. 종교 행사이자 국제 무역 박람회였다.

1170년 무신정변이 여기서 일어났다. 1232년 몽골을 피해 강화도로 옮겼다가 1270년 돌아왔다.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었다. 다리에 핏자국이 남아 비가 오면 붉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1394년 조선이 한양으로 옮기면서 도읍의 지위를 잃었다. 500년 가까이 수도였던 도시가 지방이 됐다.

조선에서 개성 출신은 관직 등용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이 상업으로 돌아섰고, 개성상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이 있다.

개성상인은 사개치부법이라는 독자적인 복식부기를 썼다. 서양의 복식부기와 원리가 비슷한데, 성립 시기를 두고 논쟁이 있다.

【남은 것】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만월대와 선죽교와 개성 남대문과 왕건릉이 포함된다.

만월대는 2007년부터 남북이 함께 발굴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다. 여기서 고려의 금속활자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고려 왕릉 상당수가 개성 주변에 있다. 조선 왕릉이 모두 남아 세계유산이 된 것과 달리, 고려 왕릉은 관리가 어렵고 도굴 피해가 컸다.

474년 도읍이었던 도시가 지금 남쪽에서 갈 수 없는 곳에 있다.

지도에서 보기: 9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경주 크라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