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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서쪽에는 프랑크·서고트·동고트 왕국이 들어섰고 동쪽 로마만 제국으로 남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옛 영토를 되찾으려 했지만 역병과 재정 파탄이 뒤따랐다.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고 남하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최전성기를 맞았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맞섰다.
왜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을 옛 경계로 되돌리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반달·동고트 왕국의 내분이 개입의 빌미가 됐다.
결과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되찾았지만 20년 전쟁과 역병으로 국력만 소진했다.
로마법을 집대성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세웠다. 옛 영토를 되찾으려다 국력을 소진했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여름 남서풍에 인도로, 겨울 북동풍에 돌아왔다. 계절풍을 읽어낸 것이 로마와 인도를 직접 이었다.
지명 · 552 · 한 달을 버티다 안에서 문이 열린 성
668년 한 달을 버티다 안에서 문이 열린 성
대동강 유역에 자리한 고구려 후기의 도읍이다. 427년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이래 고구려 멸망까지 240년 넘게 도읍으로 쓰였다.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남생·남건·남산)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장남 남생이 당에 투항해 오히려 당군의 향도(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고구려는 지도부 분열 속에 크게 약화됐다.
668년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포위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을 지키던 승려 신성이 몰래 성문을 열어 주면서 함락됐다고 전한다 — 외부의 공격만큼이나 내부 분열이 결정적이었던 사례로 꼽힌다.
보장왕이 항복하며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끝으로 멸망했고, 당은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옛 고구려 땅을 다스리려 했으나 곧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저항에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