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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바닷길을 열어 아메리카를 유럽 경제에 편입시켰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왜부유하고 분열된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65년을 다퉜다.
결과화약·상비군·용병이 결합한 근대 전쟁의 실험장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혼란 속에서 쓰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 전쟁으로 끝났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 신 앞의 평등과 카스트 부정을 설파하며 시크교를 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아홉 명의 구루를 거쳐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로 집대성됐다.
14세에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가 됐다. 12이맘 시아파를 강제해 수니파 이웃들과 갈라선 페르시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나왔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캘리컷에 도착했다. 향료 무역의 길이 바뀌었고 포르투갈이 인도양의 주인이 됐다.
장군으로 손니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다. 메카 순례 뒤 팀북투를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키웠다.
인도로 가는 서쪽 길을 찾다 아메리카에 닿았다.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해 두 왕국을 합쳤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그해 콜럼버스에게 배 세 척을 내주었다.
노트 속에 미래를 그린 사람
조각가를 자처했으나 교황의 명으로 4년간 천장에 매달려 「천지창조」를 그렸고, 여든 넘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다.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 피렌체 외교관이 실직 후 쓴 얇은 책이 근대 정치학의 출발이 됐다.
교회의 부패를 풍자하고 그리스어 신약을 펴냈다. 루터에게 길을 열었지만 분열은 거부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인쇄술을 타고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인구 20만의 도시를 다스렸다.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 컸다. 에스파냐인을 궁에 들였다가 볼모가 됐고 성난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남아메리카 끝의 해협을 찾아 태평양에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에서 전사했으나 남은 배 한 척이 세비야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스물다섯에 아즈텍의 마지막 지도자가 되어 80일 포위를 버텼다. 금을 어디 숨겼느냐며 발을 불에 지지는 고문을 받았다. 지금 멕시코에서 저항의 상징이다.
수백 명의 병사와 원주민 동맹, 천연두로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했다. 아즈텍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세워졌다.
덴마크가 주도하던 칼마르 동맹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며 근대 스웨덴 왕국의 시조가 됐다.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피를 함께 받았다. 사마르칸트를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카불로 밀려났다가 인도로 내려갔다. 회고록을 직접 썼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바스쿠 다 가마 이후 400년.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 닿는 길이 열리며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밀려났다.
지명 · 1500 · 이성계가 회군한 압록강의 섬
【그때 그 자리】
1388년의 고려는 안팎으로 막혀 있었다. 100년 가까운 원 간섭기를 지나며 권문세족이 땅을 통째로 삼켰다.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농장이 생겨 한 땅에 주인이 여럿 붙었고, 나라는 관리 녹봉도 못 댔다.
밖에서는 원이 무너지고 명이 서는 중이었다.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펴다 1374년 살해된 뒤 친원과 친명이 갈렸다.
왜구와 홍건적을 막느라 무장들이 커졌다. 최영과 이성계가 그들이다.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으로 중앙 문벌과 연이 없었고, 그래서 신진 사대부와 손잡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됐나】
1388년 명이 철령 이북 땅을 자기가 갖겠다고 통보했다. 원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땅이니 명이 잇는다는 논리였다. 공민왕이 되찾은 곳이다.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다. 우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최영을 총사령관,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로 반대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고,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으며, 온 나라의 군사가 나가면 왜구가 빈틈을 노리고, 장마철이라 활이 풀어지고 병사에게 전염병이 돈다는 것이었다. 사불가론이다.
【어떻게 흘렀나】
1388년 5월 5만 대군이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 이르렀다. 장맛비로 강물이 불어 건너지 못했다. 병사들이 병들고 달아났다.
이성계가 회군을 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이 거부했다. 5월 22일 그는 군대를 돌렸다.
개경까지 아흐레였다. 최영이 막았으나 병력이 모자랐다. 최영은 유배됐다 처형됐다. 죽으면서 자기가 탐욕을 부린 적이 있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라 했는데, 실제로 오래 풀이 나지 않아 적분이라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군권을 쥔 자가 정권을 쥐었다.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실질적인 변화는 땅에서 났다. 1391년 과전법이 시행됐다. 기존 토지 문서를 개경 한복판에서 태웠는데 사흘을 탔다고 한다.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이 그때 사라지고 새 나라의 재정이 마련됐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고, 7월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남은 것】
이 회군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오래된 논쟁이다. 무모한 원정을 막아 나라를 구한 결단인가, 명령을 어기고 군대를 돌린 반역인가.
사불가론의 네 이유는 군사적으로 대체로 타당하다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조선은 이후 명과 대체로 안정된 관계를 유지했다.
동시에 이 회군으로 고려가 회복할 마지막 가능성이 닫혔다는 견해도 있다. 요동을 향한 북진의 뜻이 이때 접혔다는 아쉬움이 조선 후기부터 표현됐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이 강가에서 내린 결정 하나로 왕조가 바뀌었고, 그 나라가 500년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