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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라틴 유럽·비잔틴·이슬람이 지중해를 나눠 가졌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곧 쪼개졌고 바이킹과 마자르가 유럽을 휘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이 무너지고 송이 섰다.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통일했고 북쪽에는 발해가 섰다. 신라 말 호족이 일어나며 후삼국으로 갈라진다.
왜인구 압력과 흘수 얕은 롱십이 결합했다. 강을 거슬러 내륙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배가 결정적이었다.
결과약탈로 시작해 정착과 건국으로 끝났다. 노르망디·러시아·아이슬란드가 이들의 손에서 생겼고, 북아메리카에도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닿았다.
당에서 군인으로 성공한 뒤 돌아와 청해진을 세웠다. 신라·당·일본을 잇는 해상 교역을 손에 넣었다.
바그다드 지혜의 집에서 일했다. 알고리즘이 그의 이름에서, 알제브라가 그의 책 제목에서 왔다. 인도 숫자를 정리해 서쪽으로 넘긴 것도 그다.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나라의 멸망 · 840 · 가축이 얼어 죽은 겨울에 적이 왔다
혹독한 한파(주트)로 가축이 대량 폐사한 직후 예니세이 키르기스가 남하해 수도를 함락했다. 유민은 서쪽 타림 분지로 이주해 정착 문명을 이뤘고, 오늘날 위구르인의 뿌리가 됐다.
【그때 그 자리】
몽골 초원에서는 유목 세력이 차례로 일어섰다. 흉노, 선비, 유연, 돌궐이다.
돌궐은 6세기에 몽골 초원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아울렀다. 그러나 동서로 갈리고 당의 이간책에 흔들렸다.
744년 위구르가 돌궐을 무너뜨리고 초원의 주인이 됐다.
【왜 그렇게 됐나】
위구르가 앞선 유목 세력과 다른 점이 있었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이 위구르에 원병을 청했다. 위구르 기병이 낙양과 장안을 되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가가 있었다. 낙양의 약탈을 허용받았고, 이후 당과 비단을 말로 바꾸는 교역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말 한 필에 비단 40필을 받았다. 당은 밑지는 거래인 줄 알면서도 받아들여야 했다.
유목 세력이 중국 왕조를 정복하지 않고 그 왕조를 살려 두고 뜯어내는 방식이다.
【어떻게 흘렀나】
762년 마니교를 국교로 삼았다. 유목 국가가 외래 종교를 국교로 삼은 드문 사례다.
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에서 나온 종교로, 빛과 어둠의 대립을 말한다.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와 불교의 요소가 섞여 있다. 페르시아와 로마와 중국 모두에서 탄압받았다.
위구르가 이를 받아들인 배경에 소그드인이 있다. 소그드는 실크로드 무역을 쥔 상인 집단으로, 위구르의 행정과 교역을 맡았다. 마니교는 그들의 종교였다.
이 선택으로 위구르는 유목 국가이면서 상업 국가가 됐다. 오르두 발릭이라는 성곽 도시를 세웠다. 유목민이 도시를 지은 것이다.
문자도 소그드 문자를 빌려 만들었다. 이 위구르 문자가 뒤에 몽골 문자의 바탕이 되고, 다시 만주 문자로 이어진다.
【그래서】
840년 키르기스의 공격과 기근과 내분이 겹쳐 무너졌다. 96년이었다.
위구르인들이 흩어졌다. 상당수가 서쪽 타림 분지로 옮겨가 정착했다. 유목을 버리고 오아시스 농경과 상업으로 전환했다.
이것이 큰 변화다. 지금의 신장 지역에 위구르인이 사는 것이 이때부터다. 그전까지 그 지역은 인도유럽계 주민이 많았다.
이들은 뒤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지금 위구르인이 무슬림인 이유다.
【남은 것】
동아시아사에서 이 나라가 자주 빠진다. 그런데 남긴 것이 여럿이다.
문자가 그렇다. 위구르 문자에서 몽골 문자가 나오고, 거기서 만주 문자가 나왔다. 청의 공문서가 이 계보의 문자로 적혔다.
안사의 난 이후 당이 위구르에 의존한 구조는, 중국 왕조가 북방 세력에 어떻게 끌려다닐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와 이어진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둘러싼 논쟁에서 양쪽 다 역사를 근거로 든다. 중국은 이 지역이 오래전부터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고, 위구르 쪽은 자기 조상이 독자적인 나라를 세웠던 땅이라고 한다.
1,200년 전 초원에서 벌어진 일이 지금의 정치 언어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