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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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조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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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폴리스의 성립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한반도

고조선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전쟁 2건

서주의 정벌과 견융의 침입BC 1042 – BC 771
주 vs 동이·회이·견융

봉건으로 나눠 준 제후들이 점차 왕실 말을 듣지 않았다. 서쪽 견융의 압박은 계속 커졌다.

동이 정벌호경 함락 BC 771

결과유왕이 견융에게 죽고 왕실이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주 왕은 이름만 남고 춘추시대가 시작된다.

271년 · 봉건 질서의 이완
춘추시대의 패권 다툼BC 770 – BC 476
제·진·초·오·월 등 제후국

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성복 BC 632필 BC 597취리 BC 506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294년 · 170국이 십여 국으로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1명

호메로스예술BC 750 · 서양 문학이 시작된 이름
BC 8세기

실존 여부조차 확실치 않다. 눈이 멀었다는 전승만 있고, 여러 음유시인의 노래가 한 이름으로 묶였을 수 있다.

  • 「일리아스」 — 분노로 시작하는 서사시
  • 「오디세이아」 — 귀향이라는 원형
  • 그리스인의 공통 교양이 됨

그 무렵의 사건

BC 776
제1회 올림피아 제전
그리스인이 같은 달력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같은 연대를 공유했다. 이후 4년마다 열려 1,100년을 이어간다.
BC 753
로마 건국 전승
테베레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됐다고 전한다.
로물루스의 건국 설화는 훗날 로마인의 자기 정체성이 됐다.
BC 800
폴리스의 형성
성벽이 아니라 광장이 도시를 만들었다.
암흑기를 지나며 그리스 각지에 폴리스가 자리 잡았다. 아고라에서 시민이 모여 결정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고, 인구가 넘치자 지중해 곳곳에 식민시를 세웠다 — 마르세유·나폴리·이스탄불이 그렇게 생겼다.
BC 800
페니키아의 바다
알파벳을 배에 싣고 지중해를 돌았다.
레바논 해안의 도시들이 지중해 전역에 거점을 두었다. 카르타고도 그중 하나다. 이들이 퍼뜨린 22자 알파벳이 그리스로, 로마로, 그리고 지금 세계 대부분의 문자로 이어진다.
BC 800
고조선의 8조법
고조선에는 살인·상해·절도를 다스리는 8개 조항의 법이 있었다고 전한다. 오늘날에는 그중 3개 조항만 전해진다.
중국 역사서 「한서」에 남은 기록에 따르면,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하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되 죄를 면하려면 많은 돈을 내야 했다. 이 세 조항만으로도 고조선 사회가 생명과 사유재산을 중요하게 여겼고, 신분 제도(노비)가 이미 존재했으며, 화폐를 대신하는 물품 배상 관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BC 814
카르타고 건설
페니키아 공주가 소가죽만 한 땅을 샀다.
티레의 디도가 망명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 소가죽 한 장 넓이만 달라 해놓고 가죽을 실처럼 잘라 언덕을 둘렀다는. 실제로는 티레의 교역 거점이었고, 600년 뒤 로마와 지중해를 두고 세 번 싸운다.

교역로

해당 없음

서주

나라의 멸망 · BC 771 · 봉건은 세 대까지만 간다

유왕이 애첩 포사를 웃기려 거짓 봉화를 올린 이야기는 후대의 각색이겠지만, 제후가 왕을 구하러 오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견융이 호경을 함락하자 왕실은 동쪽 낙읍으로 옮겼고, 그때부터 주 왕은 이름만 남았다.

【그때 그 자리】 BC 1046년 무렵 무왕이 상을 무너뜨렸다.

「천명」을 내걸었다. 하늘이 덕 있는 자에게 명을 준다는 것이다.

그 논리가 왕조 교체를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왕을 구속했다.

덕을 잃으면 명이 옮겨 간다.

【왜 그렇게 됐나】 땅이 너무 넓어 직접 다스릴 수 없었다.

봉건을 했다. 왕실 친척과 공신에게 땅을 나눠 주고 제후로 삼았다.

제후는 조공하고 군대를 내며, 자기 땅은 자기가 다스렸다.

혈연으로 묶었다. 종법이다. 큰아들이 대를 잇고 나머지는 갈라져 나가되 뿌리를 함께 모신다.

처음 몇 대는 작동했다. 성왕과 강왕 때가 전성기다.

그런데 세대가 지나며 혈연이 멀어졌다.

3대, 4대가 지나면 왕은 조상이 같은 먼 친척일 뿐이다.

제후의 땅에 대한 권리는 대대로 굳어졌다.

【어떻게 흘렀나】 여왕(厲王) 때 문제가 터졌다.

산림과 하천의 이익을 왕실이 독점하려 했다.

백성이 원망하자 감시를 붙여 말을 막았다.

신하 소공이 간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보다 위험합니다.」

듣지 않았다. BC 841년 백성이 들고일어나 왕을 쫓아냈다.

14년 동안 왕 없이 대신들이 다스렸다. 「공화(共和)」다.

그해가 중국사에서 연대가 확실한 첫 해다.

「공화국」이라는 말이 여기서 왔다.

【그래서】 마지막이 유왕이다.

총애하던 포사가 웃지 않아 봉화를 거짓으로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이야기는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봉화 체계가 그때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실제 원인은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아들을 세운 것이다.

폐위된 태자의 외가인 신후가 견융을 끌어들였다.

BC 771년 호경이 함락되고 왕이 죽었다.

【남은 것】 다음 해 수도를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동주다.

왕실이 이름만 남았다. 직할지가 작아 제후 하나만도 못했다.

그런데 그 이름이 500년을 더 갔다.

제후들이 「존왕양이」를 내걸고 패자가 됐다. 왕의 권위를 빌려 자기가 왕 노릇을 한 것이다.

공자가 되돌리려 한 것이 바로 이 서주의 질서였다.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했다.

봉건이 무너지는 과정을 본 사람들이 유가와 법가를 만들었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0년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