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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그리스 각지에 도시국가가 섰다. 왕정이 귀족정으로, 다시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갈라졌다. 인구가 늘어 흑해와 시칠리아까지 식민시를 세웠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청동기를 바탕으로 선 한반도 최초의 국가. 연·한과 부딪히며 요동에서 서북부에 걸친 세력을 유지했다.
왜봉건으로 나눠 준 제후들이 점차 왕실 말을 듣지 않았다. 서쪽 견융의 압박은 계속 커졌다.
결과유왕이 견융에게 죽고 왕실이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주 왕은 이름만 남고 춘추시대가 시작된다.
왜주 왕실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서로를 쳤다. 실제로는 패자 자리를 다툰 것이다.
결과170여 나라가 십여 개로 줄었다. 전쟁이 잦아지자 병법과 외교술이 발달했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자와 제자백가가 나왔다.
실존 여부조차 확실치 않다. 눈이 멀었다는 전승만 있고, 여러 음유시인의 노래가 한 이름으로 묶였을 수 있다.
해당 없음
나라의 멸망 · BC 771 · 봉건은 세 대까지만 간다
유왕이 애첩 포사를 웃기려 거짓 봉화를 올린 이야기는 후대의 각색이겠지만, 제후가 왕을 구하러 오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견융이 호경을 함락하자 왕실은 동쪽 낙읍으로 옮겼고, 그때부터 주 왕은 이름만 남았다.
【그때 그 자리】 BC 1046년 무렵 무왕이 상을 무너뜨렸다.
「천명」을 내걸었다. 하늘이 덕 있는 자에게 명을 준다는 것이다.
그 논리가 왕조 교체를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왕을 구속했다.
덕을 잃으면 명이 옮겨 간다.
【왜 그렇게 됐나】 땅이 너무 넓어 직접 다스릴 수 없었다.
봉건을 했다. 왕실 친척과 공신에게 땅을 나눠 주고 제후로 삼았다.
제후는 조공하고 군대를 내며, 자기 땅은 자기가 다스렸다.
혈연으로 묶었다. 종법이다. 큰아들이 대를 잇고 나머지는 갈라져 나가되 뿌리를 함께 모신다.
처음 몇 대는 작동했다. 성왕과 강왕 때가 전성기다.
그런데 세대가 지나며 혈연이 멀어졌다.
3대, 4대가 지나면 왕은 조상이 같은 먼 친척일 뿐이다.
제후의 땅에 대한 권리는 대대로 굳어졌다.
【어떻게 흘렀나】 여왕(厲王) 때 문제가 터졌다.
산림과 하천의 이익을 왕실이 독점하려 했다.
백성이 원망하자 감시를 붙여 말을 막았다.
신하 소공이 간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보다 위험합니다.」
듣지 않았다. BC 841년 백성이 들고일어나 왕을 쫓아냈다.
14년 동안 왕 없이 대신들이 다스렸다. 「공화(共和)」다.
그해가 중국사에서 연대가 확실한 첫 해다.
「공화국」이라는 말이 여기서 왔다.
【그래서】 마지막이 유왕이다.
총애하던 포사가 웃지 않아 봉화를 거짓으로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이야기는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봉화 체계가 그때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실제 원인은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아들을 세운 것이다.
폐위된 태자의 외가인 신후가 견융을 끌어들였다.
BC 771년 호경이 함락되고 왕이 죽었다.
【남은 것】 다음 해 수도를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동주다.
왕실이 이름만 남았다. 직할지가 작아 제후 하나만도 못했다.
그런데 그 이름이 500년을 더 갔다.
제후들이 「존왕양이」를 내걸고 패자가 됐다. 왕의 권위를 빌려 자기가 왕 노릇을 한 것이다.
공자가 되돌리려 한 것이 바로 이 서주의 질서였다.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했다.
봉건이 무너지는 과정을 본 사람들이 유가와 법가를 만들었다.
지도에서 보기: BC 1000년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