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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정치

흑사병 이후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지자 노동력이 귀해지고 농노제가 흔들렸다. 몽골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오스만과 명이 들어섰다.

한반도

조선 전기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새 왕조. 훈민정음과 측우기의 시대이자 사림과 훈구가 다투던 때다.

전쟁 1건

백년전쟁1337 – 1453
잉글랜드 vs 프랑스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잉글랜드 왕과, 대륙에 남은 잉글랜드 영지를 거두려는 프랑스 왕이 부딪혔다. 플랑드르의 모직 이권도 걸려 있었다.

크레시 1346푸아티에 1356아쟁쿠르 1415오를레앙 1429카스티용 1453

결과116년 만에 프랑스가 대륙에서 잉글랜드를 몰아냈다. 양국 모두 국민 의식이 생겨났다.

116년 · 흑사병과 겹쳐 양국 인구가 크게 줄었다

멸망

도시

퍼지는 중

이 막

세력

그때 그 사람 10명

이성계정치1392 · 조선 태조
1335 – 1408

위화도에서 회군해 고려를 대신할 왕조를 세웠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다.

  • 황산대첩으로 왜구 격퇴
  • 위화도 회군 1388
  • 조선 건국 1392
정몽주사상1392 · 고려를 지키려 한 사람
1337 – 1392

성리학을 세운 신진사대부이면서 고려를 고쳐 쓰자는 쪽에 섰다. 선죽교에서 죽었다. 고려는 석 달 뒤 끝났다.

  • 동방 이학의 조종으로 불림
  • 단심가 — 이 몸이 죽고 죽어
  • 1392년 선죽교에서 피살
정도전사상1394 · 조선을 설계한 사람
1342 – 1398

이성계를 찾아가 새 나라를 함께 그렸다. 한양의 궁궐과 사대문 이름을 유교의 덕목에서 따 지었다. 왕이 아니라 재상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썼다.

  • 조선경국전 — 나라의 설계도
  • 한양 천도와 경복궁·사대문 작명
  • 재상 중심 정치론
  • 1398년 이방원에게 살해
최영장군1388 · 고려의 마지막 기둥
1316 – 1388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친 명장. 요동 정벌을 주장했으나 위화도에서 군대가 돌아오면서 처형됐다.

  •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 홍산에서 왜구 대파
  • 요동 정벌 주장, 위화도 회군으로 실각
티무르장군1400 · 사마르칸트의 정복자
1336 – 1405

칭기즈 칸의 혈통이 아니어서 칸을 칭하지 못하고 사위라 했다. 35년을 정복만 했다. 1402년 오스만의 술탄을 사로잡아,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50년을 더 살았다.

  • 앙카라에서 오스만 술탄 생포
  • 사마르칸트를 세계의 중심으로
  • 5대손 바부르가 무굴을 세운다
정화탐험1405 · 일곱 차례 인도양을 항해한 명의 환관 제독
1371 – 1433 무렵

콜럼버스보다 90년 앞서 수백 척의 대함대로 동아프리카까지 갔다. 그러나 명은 항해를 멈추고 배를 태웠다.

  • 남해 원정 7회(1405–1433)
  • 말라카·캘리컷·호르무즈·말린디 방문
  • 기린을 베이징에 데려옴
이븐 할둔사상1377 · 역사학·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
1332 – 1406

튀니스 출신으로 여러 왕조를 섬기며 관료·재판관으로 일했다. 저서 「무깟디마」(역사서설)에서 왕조의 흥망을 유목민의 결속력(아사비야)과 도시 정착 후의 쇠퇴로 설명해, 근대 사회학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 「무깟디마」(1377) 저술
  • 왕조 순환론(아사비야 이론)을 제시
  • 몽골 정복자 티무르와 직접 회담(1401)
최무선과학1377 · 화약 국산화로 왜구를 물리친 고려의 무기 기술자
1325 – 1395

중국이 극비로 지키던 화약 제조법을 원나라 상인에게서 알아내 고려에서 처음으로 화약을 만들었다. 화통도감을 세워 각종 화포를 개발하고, 진포 해전에서 화포로 왜구 선단을 궤멸시켰다.

  • 원나라 상인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법 습득
  • 1377년 화통도감 설치, 화포 개발 총괄
  • 1380년 진포 해전에서 화포로 왜구 선단 격파
얀 후스사상1415 · 루터보다 100년 앞선 사람
1372 무렵 – 1415

프라하에서 면벌부와 교회의 부를 비판했다. 안전을 보장받고 공의회에 갔다가 화형당했다. 그를 따르던 이들이 일어나 15년을 싸웠다.

  • 교회 비판 — 루터보다 102년 앞섬
  • 1415년 콘스탄츠에서 화형
  • 후스 전쟁 — 농민이 수레로 진을 쳐 기사단을 깼다
주원장정치1368 · 거지 승려에서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1328 – 1398, 재위 1368 – 1398

홍건적의 난에서 몸을 일으켜 몽골을 북으로 내쫓았다. 재상제를 없애고 공신 수만 명을 숙청해 황제 독재의 틀을 만들었다.

  • 명 건국, 원을 초원으로 축출(1368)
  • 호유용·남옥 옥사로 공신 대숙청
  • 이갑제·어린도책 — 농촌 통제 체제

그 무렵의 사건

1392
조선 건국
이성계가 고려를 대신해 새 왕조를 세우고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다.
성리학이 국시가 되며 불교 중심의 고려 질서가 뒤집혔다.
1388
위화도 회군
명나라 요동을 정벌하러 파견됐던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진격, 권력을 장악했다.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가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하자 이에 반발해 요동 정벌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등 4가지 이유(4불가론)를 들어 정벌에 반대했음에도 출정 명령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그는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 이르러 장마로 강물이 불어난 것을 구실 삼아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진격했다(1388년). 이 군사 반란으로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킨 이성계는 고려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4년 뒤 스스로 왕위에 올라 조선을 세웠다.
1398
왕자의 난
조선 건국 직후, 이방원(태종)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형제와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는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는데, 정도전이 재상 중심의 정치를 구상하며 이를 뒷받침했다. 개국 공신이면서도 후계에서 밀려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1398년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1차 왕자의 난). 이 일로 태조는 실의에 빠져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후 넷째 형 방간이 왕위를 노리고 이방원과 충돌하자, 이방원은 다시 이를 진압했다(1400년, 2차 왕자의 난). 결국 정종이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했고, 그는 곧이어 사병을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을 밀어붙였다.
1405
정화의 남해 원정
영락제의 명으로 환관 정화가 300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떠났다.
첫 항해에 2만 7천 명이 탔고 배 중에는 길이 100m가 넘는 보선도 있었다 —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그 10분의 1이었다. 참파·자바·말라카·실론·캘리컷을 거쳐 이후 항해는 호르무즈와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닿았고, 기린이 베이징에 왔다. 28년간 일곱 차례 뒤 명은 바다에서 물러났고 기록을 태웠다. 정복이 아닌 위세의 항해였다는 점이 유럽의 대항해와 다르다.
1377
직지심체요절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정식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불교 선종의 가르침을 정리한 책이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됐는데, 이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1450년대)보다 70여 년 앞선 것이다. 상하 두 권 중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전해지는데, 19세기 말 조선에 근무하던 프랑스인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뒤 오랫동안 존재조차 잊혔다가, 1972년 재불 학자 박병선 박사가 이를 찾아내 세계에 알렸다.
1420
사마르칸트 천문대
1년의 길이를 1분 오차로 계산했다.
울루그 베그가 반지름 40미터의 육분의를 지어 별을 쟀다. 항성 1,018개의 자리를 담은 목록은 이후 200년간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 그가 살해된 뒤 천문대는 헐렸고 20세기에 땅속에서 다시 발견됐다.

교역로 3개

실크로드BC 130 – 1500

장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톈산과 쿤룬 사이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사막을 건넜다. 산맥이 길을 정했다.

오간 것비단·도자기·향신료가 서쪽으로, 유리·금은세공·말이 동쪽으로. 종이와 불교와 역병도 함께 갔다.
거점장안 · 둔황 · 카슈가르 · 사마르칸트 · 메르브 · 바그다드 · 콘스탄티노폴리스
초원길BC 500 – 1400

유목민의 길. 스키타이·흉노·돌궐·몽골이 이 초원을 따라 동서로 움직였다.

오간 것말과 모피와 노예. 물건보다 사람과 기술이 더 빨리 오갔다.
거점흑해 북안 · 카스피 북안 · 알타이 · 몽골고원 · 대도
해상 실크로드100 – 1500

광저우에서 말라카를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도자기와 향신료가 이 길로 움직였다.

오간 것도자기와 차, 향신료와 향목. 배 한 척이 낙타 수천 마리 몫을 실었다.
거점광저우 · 참파 · 말라카 · 스리랑카 · 캘리컷 · 호르무즈 · 바스라

고려

나라의 멸망 · 1392 · 요동을 치러 간 군대가 방향을 돌려 돌아왔다

위화도 회군이 실질적 종점이었다. 이성계는 4년에 걸쳐 반대파를 정리하고 과전법으로 경제 기반을 갈아엎은 뒤 공양왕에게 선양을 받았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은 것이 마지막 저항이었다. 474년.

【그때 그 자리】

918년 왕건이 세운 나라다. 936년 후삼국을 통일했다. 이 통일은 외국 군대를 부르지 않았고 신라가 싸움 없이 넘어왔으며 발해 유민까지 받아들였다.

출발점의 문제는 호족이었다. 왕건의 부인이 29명이라는 것은 곧 실권이 29개 가문에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다. 왕이 자기 침소에서 자객을 걱정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왜 그렇게 됐나】

광종이 이를 깼다. 956년 노비안검법으로 호족의 사병을 줄이고, 958년 과거제로 왕이 직접 신하를 고르게 했다. 성종이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 유교적 통치 체제를 세웠다.

제도가 정비되자 밖으로 버틸 힘이 생겼다. 993년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해 거란을 물리고 강동 6주를 얻었다. 1019년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 10만을 깼다. 이후 고려·송·거란 사이에 힘의 균형이 잡혀 100년 넘게 평화가 이어졌다.

【어떻게 흘렀나】

그 평화 위에서 문화가 올라갔다. 고려청자의 상감 기법은 다른 나라에 없던 것이다. 흙에 무늬를 파고 다른 색 흙을 메워 구웠다. 1087년 초조대장경, 1234년 무렵 금속활자, 1251년 팔만대장경이 나왔다.

벽란도가 국제항이었다. 송과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왔다. 이들이 부른 이름이 서양에 Corea로 전해졌다.

1170년 무신정변이 판을 뒤집었다. 문신이 도륙되고 100년간 무신정권이 이어졌다. 아래에서도 만적의 난처럼 신분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나왔다.

1231년부터 몽골이 여섯 차례 쳐들어왔다. 강화도로 옮겨 30년을 버텼다. 나라는 지켰지만 육지의 백성은 그대로 남았고, 황룡사 9층 목탑과 초조대장경이 불탔다. 1259년 강화한 뒤 80년간 원의 간섭을 받았다.

공민왕이 되찾으려 했다. 반원 정책을 펴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했으며 신돈을 써서 빼앗긴 땅을 되돌렸다. 1374년 그가 살해되면서 개혁이 끊겼다.

【그래서】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1391년 과전법으로 권문세족의 토지 문서를 태우고, 1392년 조선이 섰다. 474년이었다.

【남은 것】

고려는 다원적인 나라였다. 불교가 국교였지만 유교로 관리를 뽑고 도교와 풍수를 함께 썼다. 팔관회에는 여진과 송과 일본과 아라비아 사람이 함께 참여했다. 조선의 단일한 유교 질서와 결이 다르다.

여성의 지위도 달랐다. 재산을 아들딸이 고르게 나눠 받았고, 제사를 돌아가며 지냈으며, 재혼이 흠이 아니었다. 우리가 전통이라 부르는 것 상당수는 고려가 아니라 조선 후기에 굳은 것이다.

이름은 남았다. 영어 Korea가 이 나라에서 왔다.

지도에서 보기: 1300년의 세계 · 같은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