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투어 · 아무 곳이나 누르면 멈춤
지도에 표시
지도는 휠·더블클릭·드래그 · PgUp/PgDn은 스냅샷 이동
게이지를 Shift+드래그하면 10배 정밀 · 오른쪽 눈금은 인물·전쟁·사건이 있는 자리
틀린 데나 빠진 데를 알려주시면 확인하고 고칩니다.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연표
한 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게이지가 그 기간만 담고, 그 시대의 인물과 전투가 모두 나옵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진영으로 나눴다. 직접 충돌 대신 대리전을 치렀고, 그 사이 식민지가 해체되며 신생 독립국이 쏟아졌다.
두 정부가 서고 전쟁을 치렀다. 남쪽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 압축 성장을 했다.
왜제네바 협정이 약속한 통일 선거가 무산되며 분단이 굳어졌다. 도미노 이론을 믿은 미국이 개입을 키웠다.
결과냉전이 실제 전쟁으로 터진 자리. 20년을 끌었다.
왜이탈리아 식민지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에티오피아에 병합된 에리트레아에서, 자치권이 점차 축소되자 독립을 요구하는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결과30년에 걸친 이 전쟁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독립전쟁으로 꼽힌다. 에티오피아 내부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1974년 혁명, 이후 내전)과 맞물려 지루하게 이어지다, 1991년 에티오피아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에리트레아군도 승리를 거뒀다.
왜1948년 정치 지도자 암살을 계기로 벌어진 '라 비올렌시아'(약 20만 명 희생)의 혼란 속에서 농민들이 자위 무장조직을 결성했는데, 이 중 일부가 이후 공산주의 게릴라 FARC로 발전했다.
결과게릴라가 마약 밀매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전쟁은 이념 대립을 넘어 마약 전쟁의 성격까지 띠게 됐고, 이에 맞서 지주와 마약상들이 만든 우익 민병대까지 가세하며 반세기 넘게 여러 세력이 뒤엉킨 저강도 전쟁이 이어졌다.
왜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위임통치하던 나미비아에서,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그대로 이식하고 위임통치를 끝내라는 유엔 요구를 무시하자 독립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결과냉전 구도 속에서 쿠바군이 앙골라를 통해 SWAPO를 지원하고 남아공은 앙골라 내전에도 깊이 개입하며 분쟁이 국제화됐다.
왜사다트가 시나이를 되찾고 협상의 지렛대를 얻으려 유대교 최대 명절에 기습했다. 이스라엘 정보부는 징후를 놓쳤다.
결과초반 아랍군이 승리했으나 이스라엘이 반격해 이집트 3군을 포위했다. 미·소의 압력으로 휴전했고, 이 전쟁이 캠프데이비드 평화와 오일 쇼크를 낳았다.
왜여러 종교·종파가 정교하게 균형을 이루던 레바논의 정치 체제가,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과 종파 간 인구 구성 변화로 흔들리며 내전으로 번졌다.
결과이스라엘과 시리아가 각각 자국에 유리한 세력을 지원하며 개입했고, 수도 베이루트는 오랫동안 동서로 분단된 전선 도시가 됐다.
왜포르투갈이 물러나자 세 독립운동 단체가 정권을 다퉜다. 소련·쿠바가 MPLA를, 미국·남아공이 UNITA를 도왔다.
결과냉전의 대리전이 냉전이 끝난 뒤에도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두고 10년을 더 갔다. 50만 명이 죽고 지뢰가 나라를 덮었다. 27년 만에 UNITA 지도자가 죽자 끝났다.
왜포르투갈에서 독립한 직후, 사회주의 노선을 취한 집권 프렐리모에 맞서 로디지아(오늘날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반군 레나모가 내전을 일으켰다.
결과이웃 백인 정권들이 자국의 흑인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모잠비크를 견제하려 반군을 무장시킨 대리전 성격이 컸다. 전쟁으로 백만 명 가까이 숨지고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블랙홀도 빛을 낸다는 것을 밝히다
「0년」을 선언하고 도시를 비웠다. 4년 동안 인구의 4분의 1이 처형·기아·과로로 죽었다.
선거로 뽑힌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고 17년을 통치했다. 자유시장 개혁과 함께 수천 명이 죽거나 사라졌다.
1977년 쿠데타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축출하고 집권한 뒤, 이슬람법(샤리아)에 기반한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 미국의 핵심 우방으로서 아프간 무자헤딘 지원의 통로 역할을 했다.
반공주의자가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둥과 악수했다. 베트남에서 미군을 빼냈지만 도청 은폐로 사임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됐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세 번 숙청되고 세 번 돌아와 시장경제를 열었고, 톈안먼에서 학생들을 유혈 진압했다.
1973년 전쟁을 일으키고 1977년 예루살렘에 가서 연설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시나이를 되찾고 노벨상을 받았으나 이슬람주의 장교에게 살해됐다.
팔레비 국왕의 세속화 정책을 비판하다 국외로 추방됐다. 15년의 망명 끝에 1979년 혁명으로 귀국해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고 최고지도자가 됐다.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8년간 우간다를 통치하며 반대파 수만~수십만 명을 학살했다. 기이한 언행과 과대망상적 자기칭호로도 악명이 높았으며, 국외로는 이스라엘·서방과 대립하는 노선을 취했다.
455년 만의 비이탈리아인 교황. 1979년 고국 방문이 연대노조를 낳았고 129개국을 순방했으며 유대인과 화해했다.
죽어 가는 이들의 집을 열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켰다.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2016년 성인이 됐다.
1970년 선거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합법적으로 집권한 마르크스주의 대통령이 됐다. 구리 광산 국유화 등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경제 혼란과 미국의 반대 속에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백인 소수 정권에 맞선 독립운동 지도자로 1980년 짐바브웨 초대 총리(이후 대통령)가 됐다. 초기엔 화해와 재건을 내세웠지만 점차 권위주의로 흐르며 2000년대 강제 토지개혁과 경제 파탄, 반대파 탄압으로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1970년 아버지를 무혈 궁정 쿠데타로 몰아내고 즉위한 뒤, 극도로 폐쇄적이던 오만을 도로·학교·병원을 갖춘 근대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온건한 외교 노선으로 중동의 여러 갈등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정희 피살 뒤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잡고 광주를 유혈 진압했다. 7년 재임 뒤 6월 항쟁에 물러났고, 훗날 내란죄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1969년 무혈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뒤, 독자적인 '제3세계 이론'을 내세우며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했다. 한때 여러 테러조직을 지원해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으나 2000년대 들어 서방과 관계를 개선하기도 했다.
1969년 7월 20일 「한 사람에게는 작은 걸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 6억 명이 TV로 지켜봤다.
첫 여성 총리. 탄광 노조를 꺾고 국영기업을 팔았으며 포클랜드에서 이겼다. 사랑받거나 미움받았지 무시당하지 않았다.
1983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나라 이름을 '정직한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의 부르키나파소로 바꾸고, 관료의 특권 폐지·여성 권리 신장·자립경제를 내세운 급진 개혁을 추진했다.
네루의 딸로 1966년 총리에 올라 총 15년을 통치했다. 1975~77년 비상사태를 선포해 반대파를 탄압했고, 1984년 시크교 사원 무력 진압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경호원에게 암살당했다.
독립운동을 이끌어 1966년 말라위 초대 대통령이 된 뒤, 종신 대통령을 자처하며 30년 가까이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심했지만, 1990년대 국내외 민주화 압력에 밀려 다당제를 도입하고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다.
그림으로 양자를 계산하다
콩고 위기의 혼란 속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나라 이름을 자이르로 바꾸는 등 32년간 개인 숭배에 가까운 독재를 펼쳤다. 냉전기 반공 노선 덕에 서방의 묵인을 받으며 막대한 부를 국외로 빼돌렸다.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군비를 늘리다 고르바초프와 핵을 줄였다. 감세와 규제 완화로 미국 보수의 상징이 됐다.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작은 섬을 31년간 이끌어 1인당 소득을 영국보다 높였다. 청렴하되 권위적인 「아시아적 가치」의 모델이 됐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영국으로부터 잠비아의 독립을 이끌어내 1964년 초대 대통령이 됐다. 27년간 집권하며 '인간주의'를 내세운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으나, 구리 가격 하락에 따른 경제난 속에 1991년 선거에서 패배해 평화적으로 물러났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고도성장을 이끌었으나, 유신헌법으로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가 부하의 총에 살해당했다.
버스 보이콧에서 워싱턴 행진까지 비폭력으로 인종 분리를 무너뜨렸다. 39세에 멤피스에서 암살됐다.
쿠데타로 처형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로, 1988년 이슬람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부패 혐의로 두 차례 실각과 망명을 겪었으나 2007년 귀국해 재기를 노리던 중 선거 유세 도중 암살됐다.
43세의 최연소 당선. 「국가가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로 시작했고, 달 착륙을 약속했으며, 댈러스에서 총에 맞았다.
12·12의 동지였으나 직선제를 받아들여 당선됐다.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소련·중국과 수교했으며 남북기본합의서를 맺었다.
탕가니카(오늘날 탄자니아 본토) 독립을 이끌고 잔지바르와의 통합으로 탄자니아를 세운 초대 대통령. '우자마(공동체 정신)'를 내세운 독자적 아프리카 사회주의 노선으로 농촌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경제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108분의 비행 뒤 「지구는 푸르다」고 말했고 세계의 영웅이 됐다.
이란과 8년을 싸우고 쿠웨이트를 삼켰다가 미국에 쫓겨났다. 2003년 침공 뒤 땅굴에서 붙잡혀 교수형을 받았다.
개혁과 개방을 밀어붙였고, 그 끝에서 소련이 해체됐다.
바티스타 독재를 게릴라전으로 무너뜨리고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언했다. 미국의 코앞에서 반세기 가까이 권좌를 지켰다.
소련 해체로 독립한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15년간 극단적인 개인숭배 체제를 구축했다. 스스로에게 '모든 투르크멘의 지도자'라는 뜻의 '투르크멘바시' 칭호를 붙이고,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달(月)·황금 동상을 전국 곳곳에 세웠다.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다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을 이끌었다. 장관직을 버리고 볼리비아 밀림에서 게릴라로 싸우다 처형됐다.
1991년 8월 탱크 위에서 연설해 보수파 쿠데타를 무너뜨렸고 넉 달 뒤 소련을 해체했다. 충격요법과 혼란, 그리고 푸틴에게의 승계로 끝났다.
1959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비폭력으로 티베트 자치를 호소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세계의 종교 지도자가 됐다.
CERN의 물리학자들이 문서를 나누게 하려고 HTML·HTTP·URL을 만들었다. 특허를 내지 않아 웹은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됐다.
1958년 프랑스가 옛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제안한 '프랑스 공동체' 잔류 국민투표에서, 기니만이 유일하게 거부표를 던지도록 이끌어 즉각 완전 독립을 얻어냈다. 이후 26년간 권위주의적으로 기니를 통치했다.
1940년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다」라고 방송했다. 알제리 전쟁의 혼란 속에 돌아와 대통령제 헌법을 만들었다.
영국령 골드코스트를 이끌어 가나로 독립시켰다. 범아프리카주의를 내걸었으나 1966년 외유 중 쿠데타로 쫓겨났다.
게릴라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오슬로 협정으로 자치정부를 세웠으나 평화는 오지 않았고 라말라 관저에 갇힌 채 죽었다.
최연소 의원에서 40년 야당 투사로 살았다.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시행했으며, 임기 말 외환위기를 맞았다.
인종분리 정책에 맞서다 종신형을 받고 27년을 갇혔다. 나와서 복수 대신 진실화해위원회를 세웠다. 가해자가 사실을 말하면 사면하는 방식이었다.
1952년 군주정을 무너뜨린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 권력을 잡았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았지만 외교적으로 승리하며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94년 벨라루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래 30년 넘게 집권하며 소련식 국가 통제 경제와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왔다. 2020년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강경 진압했고,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에 자국 영토를 병참 거점으로 제공했다.
제20차 당대회 비밀 연설로 스탈린 숭배를 깼다. 스푸트니크를 쏘고 유엔에서 구두를 두드렸으며 쿠바 위기 뒤 실각했다.
아버지에게 권력을 물려받은 첫 공산 세습자. 대기근 속에 선군정치를 폈고 핵실험으로 세계와 맞섰다.
26년간 총리로 마오의 그늘에서 나라를 굴렸다. 제네바와 반둥에서 신중국을 세계에 소개했고 닉슨을 맞았으며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줄이려 애썼다.
DNA 이중나선을 밝히다
생명의 중심원리를 제시하다
반군을 이끌고 라이베리아 내전을 촉발한 뒤 1997년 선거로 대통령이 됐다. 이웃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해 반군을 지원하고 다이아몬드 밀매에 관여한 혐의로, 퇴임 후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전직 아프리카 국가원수가 됐다.
51번 사진을 찍은 사람
군 쿠데타 실패로 투옥됐다가 선거로 대통령에 올라, 막대한 석유 수익을 빈곤층 지원에 쏟아부으며 저소득층의 강한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언론·사법부 장악과 반대파 탄압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인천에 상륙해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확전 문제로 해임됐다.
불가촉천민으로 나 미국과 영국에서 박사가 됐다. 독립 인도의 헌법 초안을 썼고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금지 조항으로 넣었다. 간디와 이 문제로 정면으로 부딪쳤다.
만주 항일 유격대 출신으로 소련의 후원 아래 정권을 세웠다. 남침으로 300만이 죽는 전쟁을 일으켰고 3대 세습 체제의 시조가 됐다.
납치와 사형 선고를 넘긴 야당 지도자가 네 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됐다. IMF 위기를 넘기고 남북정상회담을 열었다.
국공내전에서 이기고 톈안먼에서 건국을 선포했다.
해당 없음
사건 · 1975 · 도시를 비우고 인구의 4분의 1을 죽인 4년
도시를 통째로 비우고 강제 농업 노동을 시켰으며, 지식인·소수민족·구 정권 관계자를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사망자는 150만~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정권이 무너졌다.
그때 그 자리: 1975년 4월,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무장 세력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장악했다. 그들은 곧바로 도시 주민 전체를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왜 그렇게 됐나: 베트남전쟁의 여파로 캄보디아가 미군 폭격과 내전에 휩쓸리며 사회가 붕괴 직전이었다. 크메르 루주는 원년(Year Zero)이라는 극단적 이념 아래, 도시와 화폐와 사유재산과 종교를 모두 없애고 순수한 농업 공산사회를 만들려 했다.
어떻게 흘렀나: 지식인과 교사와 의사와 안경 쓴 사람까지 구 사회의 적으로 몰려 처형됐다(투올슬렝 수용소가 대표적이다). 강제 노동과 기근으로도 대규모 사망이 이어졌다. 1978년 캄보디아가 베트남 국경을 침범하자 베트남이 1979년 침공해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4년 동안 인구의 4분의 1에 가까운 150만에서 200만 명이 처형과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폴 포트는 정권 붕괴 뒤에도 정글에서 저항을 이어가다 1998년 사망했다.
남은 것: 유엔이 지원한 특별재판(ECCC)이 2000년대에야 크메르 루주 지도부 일부를 재판에 넘겼다. 폴 포트 본인은 재판 없이 죽어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캄보디아는 이 시기를 킬링필드로 부르며 국가적 기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지도에서 보기: 1960년의 세계 · 같은 시대: 파푸아뉴기니 독립 카네이션 혁명 키프로스 분단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칠레 쿠데타 오일 쇼크